요즘은 덜해졌지만 예전의 제 버릇 중에 하나로, 가위로 종이를 잘게 자르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습니다.
화가 난다든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든지 아무튼 네거티브한 쪽의 감정 처리가 잘 되지 않을 때는,
마치 무로 채를 썰듯 가위를 들고 종이를 자르는 것이었지요. 둥둥 떠다니는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저의 그런 모습을 본 적 있는 친구가 어느 날 제게 문서세단기(Paper Shredder)를 선물로 주더군요.
물론 그 선물을 받은 이후에도, 감정 정리를 위한 '명상의 시간'에는 여전히 가위를 사용해야 했지만, | 
文書細断機 |
그 문서세단기는 저를 미소짓게 만들기도 해서 ^^a 가끔은 그걸 쳐다보는 것 만으로도 '감정의 모드 전환'이 가능하기도 한데요.
 | 몇달 전 어느날 그 문서세단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불현듯 그걸 선물해준 친구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전화 통화 잠깐, 그리고 달려갔습니다. 제한 속도를 넘나들 듯 달려도 한시간 가까이 걸리는 그를 만나러.
함께 늦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그리고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아마 마석 가구단지 만큼 많지는 않겠지만, 여기도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이 제법 많아.」
「과일같은 것도 인터넷으로 사먹어. 이제 엔간한 건 다 온라인으로 사. 그런지 제법 되었어」
「이렇게 밤에만 오지말고 언제 한 번 낮에 와 봐. 여기 경치, 아직까지는 괜찮거든.」 |
그러고 보면 그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는 곳에 제가 들릴 때면 그것은 언제나 한밤중이었습니다.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늘상 한밤중에 가게 된 것 뿐인데,
낮에 와보라는 말을 듣고나니, 그를 찾아가는 길의 이미지는 늘 한밤중에 달리는 국도의 이미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더군요.
언제적부터 친구였는지 떠올리려면 서로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로 오랜 친구인 그와는 참으로 많은 추억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떠난 여러 번의 여행 중에서, 오래 전 겨울 경상북도 울진의 불영(佛影)계곡에 갔던 날들도 그런 추억 중의 하나입니다.
기차에 내려 불영계곡 어딘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해 넘어간지 오래라서 칠흙같이 깜깜한 길을 걸어 어느 산장에 도착했던 기억.
산장에서는 그 겨울에 손님이 있을 거라고 예상치 않았던지 미리 난방을 해둔 객실이 없었고 (그날 투숙객은 저희들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장작을 때서 온돌을 데우는 식의 난방이라, 방에다 배낭만 부려놓고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직접 불을 지폈습니다.
그 다음날 들렸던 불영사(佛影寺)도 지금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고, 부석사(浮石寺)에 갔던 것이 그 여행에서였는지 헷갈리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분명한 것은, 아궁이 안에서 벌겋게 타오르던 장작더미들과 말그대로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별들, 별들입니다.
벌겋게 노랗게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그 넘실거리는 불꽃에 황홀하다는 느낌까지 받으며 얼굴은 익을 듯 뜨거워지는데
그러는 한편 살을 에이는 추위로 견디기 어려워질 정도로 차가워진 등짝을 데우고자 몸을 돌려 아궁이를 등지고 밤하늘을 마주했을 때
계곡과 산과 밤하늘의 경계를 알 수 없을 만큼 칠흑같이 까만 밤, 그 밤하늘에 쏟아부어놓은 듯 흩뿌려진 별들, ☆ 별들. ☆
쏟아부은 듯 그렇게 많은 별들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고, 그 때 이후 지금까지도 그 만큼의 별들을 본 적은 없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들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빛은 서로 뚜렷이 구분되지만 서로에 대해 결코 낯설어지는 법이 없다.
∼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acs)의 소설의 이론(Die Theorie des Romans)
심설당 간행. 반성완 역. 1985(1998 중판) p.25 중에서 |  |
불영계곡 어느 산장의 아궁이에서 타오르던 장작불 앞에서 마치 배화교(拜火敎)의 신도라도 된 듯 황홀감에 빠졌던 그 때‥,
사위(四圍)의 경계도 알 수 없이 까만 밤, 밤하늘에 쏟아부어놓은 듯 흩뿌려진 별들에 입을 다물지 못했던 그 때‥,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함께 장작불과 별을 바라보던 그 친구도 아마 알 수 없었을 겁니다.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이 우리들에게도 분명히 있었을 바로 그 때 그 시절이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나날이었다는 것을.

La Nuit Etoilee a Saint-Remy | 장작불과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보던 그 때로부터 시간 아니 세월이 한참 지나버린 지금,
그것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처럼‥ '타오르는 불꽃'같은 것도 제 마음 속에서 만나기는 힘듭니다.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スターゲイザー(스타게이저, Stargazer)의 한 구절과 같은 세상에서,
이를테면 그저 '올바르게 꾸며진 세계에서(正しく飾られた世界で)'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어 '올바르게(!)' 꾸며진 이 세계에 제가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싶어지면
새로움도 모험도 저 스스로 먼저 슬그머니 피하면서 이 세계의 경계 밖에 발 내딛기를 두려워 합니다. |
며칠 전, 앞서 얘기한 그 친구와 또 한 차례 전화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대학에서의 전공이 동양화였지만 사회에 나온 지금은 화선지 대신에 얼굴에 붓질을 하는 분장사인데요.
최근 한두달 일거리가 없는 틈에 자동차 튜닝 등 전기와 관련된 DIY를 새로운 취미로 삼았다는데
취미를 위해 장만한 각종 장비는 마치 건축 현장에서 작업하는 전기공의 그것을 방불케 했습니다.
LED 램프 제작 과정을 설명하면서 저항, 회로 등의 단어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그가 신기하기도 했고
그가 만든 '평활회로(平滑回路)장치'라는 것이 뭔지 잘 이해가 안되어서 머리를 갸웃거리기도 했습니다. | 
CYCLE HIT 1997-2005 |
「뒷 범퍼 쪽에 카메라를 부착해볼까 해. 센서? 아, 그런 건 많지. 하지만 그것보다 카메라말이야. 어때? 괜찮지 않아?」
「난 아무 것도 아냐. 자동차 튜닝 DIY 동호회 들어가보면, 장난 아냐. 트레이 방식으로 노트북을 매립하는 사람도 있더라니까.」
「일? 있으면 좋긴 하지만, 뭐‥ 없으면 없는대로 가는 거지 뭐. 안달복달한다고 해서 없던 일거리가 갑자기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일없으니까 살찌드라. 이거 아니다 싶어서 먹는 양을 무조건 반으로 줄였어. 그랬더니 한달 만에 3kg 빠지드라구.」
주민등록 주소에 '구'나 동'이 아니라 '읍'이나 '리' 등의 지명이 들어가는 곳으로 그가 이사 들어간 이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언제나 한밤중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함께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으면서, 요즘 들어 바꾸었다는 그의 커피 취향을 같이 즐기면서,
주차장에서 그의 최근 취미 생활을 구경하면서, 그렇게 오랜 만에 그와 함께 보낸 시간.
그 쯤에서 멈추기는 아쉬웠지만 다음에 또 만나기로 하고 해지기 전에 그 곳을 떠났습니다.
서울로 들어올 즈음, 해질 녘의 한강변 풍경을 보고 '아.. 좋다' 하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그가 얘기했던 그 동네의 풍경을 느긋하게 본다는 걸 그만 깜박 잊고 서둘러 서울을 향했기 때문입니다. | 
スターゲイザー |
며칠 전부터 서울은 벚꽃축제 기간입니다. 개나리는 활짝 피었고 길가 여기저기 벚꽃으로 화사함이 가득합니다.
사실 저는 벚꽃이 필 때보다는 벚꽃이 질 때가 더 좋습니다. 불어오는 봄바람에 마치 비오듯 흩날리는 꽃잎의 풍경을 좋아해서지요.
또 벚꽃이 질 때가 더 좋은 또다른 이유 하나는 그 즈음에 되어서야 비로소 나무들이 초록빛을 제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벚꽃이 만개했어도 몇몇 다른 나무들은 아직 앙상하게 가지만 남아있으면 아직 봄이 오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잖아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이 질 때, 그리고 나무들이 모두 초록으로 충만해질 때 그에게 한번 더 가볼까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깜박 잊고 눈여겨 보지 못했던 그 동네 풍경도 즐기고, 순대국밥도 먹으면서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와야겠습니다.

色色衣 | 遠く 遠く 果てしなく続く 道の上から
멀리 멀리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
強い 思い あの光まで 届いてほしい
격한 마음 저 빛까지 닿았으면 좋겠네
ひとりぼっちがせつない夜 星を探してる
외톨이가 견딜 수 없는 밤 별을 찾고 있어
明日 君がいなきゃ 困る 困る
내일 네가 없으면 곤란해 곤란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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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핏츠의 スターゲイザー(스타게이저, Stargazer) 수록 음반 리스트.
2004년 1월 21일 발매 싱글 スターゲイザー(스타게이저, Stargazer).
2004년 3월 17일 발매 앨범 色色衣(이어붙여 기운 옷, Iroiro Goromo).
2006년 3월 25일 발매 앨범 CYCLE HIT 1997-2005.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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