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と暮らせたら Kimi to Kurasetara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
ⅰ :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라디오의 목소리는 록 밴드 '스피츠'의 보컬처럼 약간 허스키한 고음이다.
"우리 집은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았어. 부모님도 이혼하지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지. 지금부터 5년 전인 중학교 2학년 봄에 부모님은 나한테 이과 실습용 조립품을 사 줬어. 드라이버 하나와 납땜인두만 있으면 조립할 수 있는 에프엠 송신기야. 일요일 오후에 온갖 정성을 쏟으며 열심히 조립했어.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결심했지. 오늘 밤에 꼭 시험 방송을 해 보겠다고. 그래서 한밤중에 일어나 몰래 밖으로 나갔어. 송신기 스위치를 ON으로 켜 놓은 채."
‥ ‥ ‥
이윽고 라디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멀리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
"실패했다는 애들도 있지만, 그 무렵에 막 나온 유투의 앨범을 좋아해서, 「스테이」라는 노래를 엔드리스 테이프에 녹음해서 송신기에 연결하고 집을 나섰어. 그런 다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녔지. 자전거에 작은 에프엠 라디오를 싣고. 푸근한 봄날 밤이었어. 거리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잡음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면서, 내 방송국에서 틀어 놓은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라디오로 흘러나왔어. 어떤 길로 접어들자 갑자기 활짝 핀 하얀 벚꽃하고 보노의 안개 같은 편안한 노랫소리가 겹쳐졌어.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가깝네‥‥‥.' 그 노래의 가사야. 곧게 뻗은 거리를 전파가 안 잡힐 때까지 달리기도 하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집에서 멀어져 보기도 했지. 여름밤의 바다를 헤엄치는 돌고래도 그만큼 즐겁지는 않을 거야. 떨어져 있는데도 이어져 있는 듯한 그 느낌. 원래 친구도 별로 없었던 탓에 그때부터 점점 전파에만 빠져들었지. 석 달쯤 지나 여름이 될 즈음엔 나한테 라디오라는 별명이 붙어 있더군."
라디오는 행복한 녀석이다. 어쨌든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맛보기 어렵다. 그러니까 마약이 잘 팔리는 거다.
∼ 이시다 이라(石田衣良)의 소설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池袋ウエストゲートパーク) 중,
오아시스의 연인(オアシスの恋人)에서 발췌. | 
池袋ウエストゲートパーク |
'라디오'라는 별명의 인물이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지만 그가 묘사되는 이 대목이 주는 느낌이 좋아서 천천히 한번 더 읽었다.
「스테이」. 맞아, 그 노래 좋지. 그래서 책을 읽다 멈추고 노래를 찾아서 들었다. 오랜만이다. 여전히 좋다.
Faraway, so close
Up with the static and the radio
With satelite television
You can go anywhere
And if you listen, I can't call
And if you jump, you just might fall
And if you shout, I'll only hear you |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렇게 가깝네
잡음 섞인 라디오나
위성 텔레비전으로
넌 어디라도 갈 수 있지
그리고 난 너를 부를 수 없지만 네가 듣고있다면
그리고 네가 굴러 떨어진 만큼 뛰어오를 수 있다면
그리고 나만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쳐준다면 | 
U2
Zooropa |
살펴보니 U2의 Stay (Faraway, So Close!)는 1993년에 나왔는데, 그 즈음에 나는 어떤 노래를 좋아했었지?
(비록 소설 속 인물이긴 해도) '라디오'가 중학교 2학년 때 그 노래를 좋아했다면 중학교 2학년 때 내가 좋아했던 노래는 뭐였더라?
1993년이든 중학교 2학년 때였든 그 시절에 어떤 노래를 좋아했는지 제법 한참 생각해봤지만‥, 특별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ⅱ : 부산항 국제크루즈터미널
지난 팔월 마지막 월요일 새벽.
서울역 매표구에서 지금 바로 떠나는 열차표를 달라고 해서 경부선 KTX에 탑승한 것은,
비록 간밤에 하행선 첫차가 언제 있는지 살펴봤다고는 해도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특별한 일정도 없이, 그저 오랜 친구 한두 명 만나고 오겠다는 생각 정도 뿐이었고
게다가 부산역 광장으로 빠져나와서 낮시간에 친구가 있을 만한 동네로 이동할 때까지 그에게 연락도 하지 않았으니.
갑작스런 방문이 혹시 바쁠지도 모를 그에게 방해가 될 수도 있어서 그저 잠깐 티타임 정도의 짬만 생겨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예전보다 더 검게 그을린 듯한 그의 얼굴,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의 등짝을 툭 치는 그의 손바닥이 주는 느낌. 좋았다.
겸사겸사해서 할 일이 없나 따져본다든지 하지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그랬다면 떠나지 못했을테니까. 이렇게 만나지 못했을테니까.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연락도 없이 웬 일이냐?'라든지 '어떻게 지내냐?'면서 허허대다가, 뭔가 떠올랐는지 갑자기 그가 그랬다.
―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가자. 내가 어제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거기 좋아. 시간, 괜찮지? 거기 가자.
 | 주차장에는 차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입국장과 출국장이 있는 듯한 건물의 문도 잠겨 있었다.
오후 너댓시 쯤에 그랬으니, 모르긴 해도 '크루즈'라는 배가 매일 분주하게 드나드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부산항 국제크루즈터미널.
터미널 관계자라고는 주차관리인 한 명만 눈에 띌 뿐이었고 우리 둘 말고는 낚시하는 사람 서넛 남짓.
바다를 바로 눈 앞에 발 밑에 두고 앉아서 그와 내가 함께 지냈던 지난 날과 따로 지낸 요즘을 이야기했다.
‥ 노천의 커피 자동판매기에 동전이 여러 차례 들어갔다. |
ⅲ :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맛보기 어렵다
우리가 친구가 된 것은 중학교 이학년, 같은 반이 되면서부터였다.
돌이켜보면 그 때는 너나 할 것 없이 둘다 '열다섯 살 즈음의 허점투성이(十五の頃の スキだらけ)'였다.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君と暮らせたら(Kimi to Kurasetara,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노랫말처럼.
(가끔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기도 하다.
그저 마음 뿐이지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도 없지만.)
언젠가 뜬금없이 합창 공연을 보러오라길래 가봤더니 대학 시절 내내 합창 동아리 활동을 했다던 그.
그는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어문학 전공자가 보통 그렇듯) 전공과는 상관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는데
한 해 두 해 지나자 주위에서 보기에는 그 상관없는 길이 마치 애당초 선택했야 할 전공같기도 했다. | 
1995-09-20
スピッツ
ハチミツ |
그렇게 걸어오던 길, 이제는 그 누구도 '상관없던 길'이라 말할 수 없게 된 그 길에서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게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걸었다. ‥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다시 '전에 걷던 길'로 되돌아 왔다.
잠시 벗어나 다른 길을 걷고있던 동안. 그때를 두고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았다‥'고.
 | 힘들어서 도움이, 직접적인 도움이 필요했을 때 그 도움을 친구에게는 받기가 어렵더라고 그랬다.
친구에게는 힘들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뿐이고 또 그것을 기꺼이 들어주는 게 친구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그런 말과 함께 '잠시 벗어나 있던 동안'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고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에게 맞는 일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제대로 찾아내고 거기에 인생을 걸어본다는 것은 정말 힘들다.
(스스로 아직은 청춘이라고 생각될 때 그걸 찾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
생각보다 짠 내가 덜한 바닷바람이 그가 피우는 담배 연기를 날려보냈고 일회용 종이컵은 겹쳐진 채로 쌓여가다 뭉쳐서 구겨졌다.
라디오는 행복한 녀석이다.
어쨌든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순간을 맛보기 어렵다. |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만나기는 정말 그렇게나 어려운 것일까?
'라디오'처럼 중학교 이학년 때는 아니더라도 대학 시절에라도, 스무살 시절이 끝나기 전에라도 그런 순간을 맛볼 수는 없을까?
아니, 청춘은 고사하고 덕지덕지 낀 생활의 때가 지워질 리 없는 지금에라도 혹시 맛볼 수는 없을까? 그런 순간을.
텅빈 국제크루즈터미널에서 우울한 생각, 가라앉은 이야기만 나눈 것은 아니었다.
여름 휴가를 다녀와보니 애완동물로 키우던 뱀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아 혼비백산했었다는 이야기로 날 웃겨주기도 했으니까.
ⅳ :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연휴 내내 별 일 없이 집에서 몇 권의 스파이 소설을 읽으면서 주전부리로 이것저것 먹다보니 살만 찌는 기분이 들고
체중계에 올라서니 실제로 체중이 불기도 해서 개천절 연휴 마지막 날 오후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한강으로 나갔다.
서강대교와 당산철교 사이에 있는 한강 북단 둔치의 잔디밭에 앉아 강 건너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라디오인지 mp3P인지 음향기기를 자전거에 부착하고 달리며 내 앞을 지나갔다.
무슨 노래인지는 모르지만 업템포의 노래가 마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패닝되는 듯 들렸다가 사라졌다.
이시다 이라의 소설에서 인상깊게 읽었던 대목과 국제크루즈터미널에서 친구와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리고 「떨어져 있는데도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성산대교 북단에 이르자 둔치에는 산책나온 사람들로 붐볐고 한강에는 제트스키 등 물놀이 하는 사람들도 제법 많이 보였다.
앞서 당산철교 직전의 잔디밭에 앉아 쉬기도 했고 가지고 나온 물도 반병이나 남아서 매점에 들릴 일도 굳이 없으니
산책하는 사람이든 자전거 타는 사람이든 흔히들 쉬어가는 성산대교 북단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튼 다음 홍제천을 타고 올라갔다.
자전거 타고 홍제천은 처음이기도 하고 천변이 아직 제대로 정비가 되어있지 않기도 해서 천천히 달렸다.
사천교, 홍연교, 백련교 등 차 타고 지나다닐 때 도로 표지로만 눈에 익던 작은 다리들이 머리 위로 지나쳤다.
그랜드힐튼 호텔이 있는 곳까지 다다르자 천변에는 더이상 산책로나 자전거길이 없는 듯 하다.
다음에는 불광천을 타고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변을 벗어나 차도 쪽으로 올라섰다.
가게에 들어가 음료수를 사면서 또다른 어문학 전공의 친구를 잠깐 떠올렸다.
스무살 시절에 일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해서 지금까지 그걸 공부하고 있는 그는 어떨까?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것과 만날 수 있었다는 '라디오'와‥ 같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는 그 때가 언제였는지.
스무살 초입이었을까 아니면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일본으로 떠나던 무렵이었을까? |  |
남은 음료수는 케이지에 넣고 헬멧의 버클을 채우고 페달을 밟아 다시 천변으로 내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홍제천 그리고 성산대교 북단을 지나 붉게 물든 해를 뒤로 하고 한강변을 달리면서 스핏츠의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떨어져 있는데도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친구를 생각하면서, 이시다 이라가 상상한 '라디오'의 목소리가 그런가 하면서.
● 君と暮らせたら 노랫말 살펴보기
ジグザグこだましながら 声が遠くまで届いていきそうな
見上げれば 雲の流れに 今いる場所を忘れちゃいそうな
寂しいあの街で 君と暮らせたら
지그재그 메아리치면서 목소리가 멀리까지 닿아 갈듯한
올려다보면 흘러가는 구름에 지금 있는 곳을 잊어버릴 듯한
외로운 그 거리에서 너와 살아갈 수 있다면 |
√ 君と暮らせたら 노랫말(우리말 번역)의 출처는 (c) spitzHAUS 입니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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