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지금 바쁜 거, 아니지? 프린트할 거 있는데. 나중에 그 쪽으로 갈게.
마침 프린트할 게 있으니 그 김에 한 번 보자고,
때로는 문자메세지로 때로는 전화로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 그것은 그냥 내세우는 말일 뿐,
그는 그런 식으로 잠시 짬을 내어서 나를 만난다. 지난 해 내내 그랬다.
얼마 전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인터넷으로 접수한 몇몇 대학에 우편으로 보낼 편입학 관련 서류를 출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보니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시험만 연거푸 치르고 나면 그의 오랜 '심해잠수'도 끝나겠군.
그에게 필요한 프린트를 끝내고 내가 하던 일도 대충 접고 그와 함께 저녁 먹으러 가던 길.
그는 생뚱맞게 내게 이런 말을 했다.
― 서류 한 번 내봐. 편입해서 같이 다니자. 흐핫! |  |
학사 편입이라 해도 경쟁률이 두 자리나 되는 편입을 두고 식전의 애피타이저 메뉴 골라보라는 듯 쉽게 말하는 것도 웃겼는데
그 생뚱맞은 말에, 너랑 같이 다닌다 해도 공부는 이제 못하겠고 록밴드나 결성하고 싶다고, 나도 덩달아 추임새를 넣는 바람에
얘기는 급진전, 나 뿐만 아니라 그 친구까지 가상의 밴드 포지션이 정해지는 등, 그렇게 둘이서 한참을 낄낄거렸다.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거나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는 것의 허용 범위를 아무리 느슨하고 너르게 잡아본다 해도‥,
'한 번 더 대학생'이나 '록밴드 결성'은 나한테 얼토당토않은 소리다.
설령 그는 진심이라고 해도 나는 그저 웃자고 하는 소리고 기껏해야 잠깐의 백일몽이다. 하지만.
실제로 록밴드를 결성할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해도, 당치도 않은 나에게 함께 밴드를 하자고 말하는 그가 있어, 즐거웠다.
ⅱ
「떨어져 있는데도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친구. 며칠 전 그가 보고 싶어졌다. 몹시.
오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친구가 '몹시' 보고 싶어지면 어쩔 수 없다. 전화라도 걸어야 한다.
무언가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할 때, 까닭 없이 친구를 만나고 싶어진다. 변치 않는 친구. 언제 만난다 해도 어제 만났던 것 같은 얼굴로 만날 수 있는 친구. 항상 내가 먼저 연락을 하지만 그것도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친구. 나는 구마이 노조무(熊井望)에게 전화를 건다.
∼ 이토야마 아키코(絲山秋子)의 소설 더티 워크(ダーティ・ワーク) 중에서. |
하지만 신호음만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그와는 연결되지 못했다. 두어 시간 뒤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 미안. 초상집에 와있는데 소란스러워서 진동을 못느꼈다.
왜 전화했었냐고 그가 나에게 묻지는 않았지만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왠지 궁금해 할 듯 싶어서
'특별한 일은 없고 그냥 한 번 걸어봤다'고 얘기했더니 그는 웃으며 경상도 억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 다음에도, 그냥, 자주, 전화해라. 응? ^^ | 
ダーティ・ワーク |
오백 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그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것이, 휴대폰 너머로 느껴져서, ‥ 콧등이 잠깐 시큰거렸다.
ⅲ
빅뱅의 하루하루 그리고 태양의 나만 바라봐, 이 두 곡은 요즘 내가 자주 듣는 노래다.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가 멜론에서 320Kbps의 고음질로 다운로드해준 덕분에,
어딘가를 다니다가 또는 집에서 TV를 통해 스치듯 들었던 그 노래들을 이제 제대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럭저럭 참아볼 만해 그럭저럭 견뎌낼 만해
넌 그럴수록 행복해야 돼 하루하루 무뎌져 가네 |
빅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힙합 분위기의 손동작과 몸짓을 섞어 춤을 추는 그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백팔십 센티미터가 넘는 키의 그가 리듬을 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
뭐라고 표현해야 적당할까‥, 그런 그를 쳐다보는 것 만으로 내가 위로를 받는 느낌? 그런 게 생긴다. | 
빅뱅 |
아무튼 내게는 그가 태양이나 G-드래곤보다 훨씬 멋있는 '아이돌'인데, 그냥 그가 내 곁에 있다는 느낌 만으로도, ‥ 기쁘다.
ⅳ
아주 오래 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몇 페이지 읽다가 그만 둔 이후로 나는 공지영의 책을 펼쳐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작년에 나온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역시 읽은 적이 없다.
아마 앞으로도 읽을 일이 없을텐데 이 책 제목 만큼은 자꾸 떠오른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삶에 본보기가 되고 도움이 되는 말 또는 힘을 북돋워 주는 말은, 사실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탓에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플랫폼의 벽면에서도 서점에서 책을 살 때 끼워준 북마크에서도 그런 말들을 자주 만나는데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볼 때는, 말그대로 '정면으로' 그것들과 마주할 수 밖에 없을 정도다.
그렇게 쉽게 마주치다 보니, 곱씹어볼 만한 어구임에도 그냥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
평소에 그렇게 그냥 지나치는 경구(警句)나 금언(金言)과 그다지 다르지 않고
게다가 내가 관심을 전혀 두지 않는 공지영의 책 제목에 불과한데
왜 이 말은 내가 몇 번이고 입 안에서 되뇌고 있게 되는 걸까?
‥
‥
그래, 나도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거다. ‥ 위로받고 싶은 거다. |
ⅴ
같이 '한 번 더 대학생'이 되자던 그 친구에게서 며칠 전에 전화가 왔다.
그는 두어 차례의 학사편입 시험을 치렀던 참이었는데
주말에 치렀던 시험을 생각보다 못쳤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전화를 마치기 전에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나, 할 수 있지? 나, 할 수 있는 거지?
그 전과는 달리, 그 날 저녁에는 내가 그에게로 갔다.
먹골역 근처의 어느 메기매운탕집을 찾아가 둘이서 저녁을 먹었다.
'메기가 상당히 큰놈인데? 수제비도 좋아! 마지막에 라면사리 추가까지 아주 좋았어! 그치?'
만나서 저녁 먹고 헤어질 때까지 한 시간 남짓, 그와 나는 메기매운탕 이야기만 했다.
그것으로 족했다. |  |
같이 '한 번 더 대학생'이 되어서는 '록밴드 결성'이 어떠냐는 친구의 황당한 제의에서 비롯되는 잠깐의 즐거움.
「떨어져 있는데도 이어져 있는 듯한 느낌」의 친구에게 그냥 전화 해봤다가 오백 킬로미터 건너편에서 받게 되는 작은 감동.
그리고 나의 '아이돌'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가 빅뱅을 흥얼거리며 리듬을 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느끼는 기쁨.
이 셋 모두 사소한 것들이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사소한 만큼 흔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사소하지만 귀한 감정이다.
나는 그 사소한 것에서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 날의 메기매운탕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夕焼け(Yuuyake, 저녁놀)를 들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처럼.
‥
‥
그래, 나도 위로받고 싶은 거다. ‥ 너에게. | 
群青
● 夕焼け 노랫말 살펴보기 |
ⅵ
● 스핏츠 팬들을 위한 덧붙임, 열기 CLICK
2007년 8월 1일에 발매된 스핏츠의 33번째 싱글 群青(Gunjoh, 군청)의 커플링 곡, 夕焼け(Yuuyake, 저녁놀).
타카야마 토오루(高山徹)의 레코딩, 마키노 에이지(牧野英司)의 믹스다운, 연주시간 5분 17초.
몽롱하고 따뜻한 느낌의 건반악기 월리처(wurlitzer) 연주에는 미나가와 마코토(皆川真人).
특히 간주의 끝, 그러니까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미와 테츠야(三輪テツヤ)의 기타 연주가 몰아친 다음,
그 일렉트릭 기타의 잔향이 사라지지 않을 듯한 그 순간에 가슴에 화악 퍼지는 월리처 사운드의 따뜻함이란!
그 몇 초 되지도 않는 짧은 순간에 피아노의 음률이 건네주는 위로의 따뜻함은‥,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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