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の途中 Tabi no Tochuu 여행 도중 |
ⅰ : 첫 마주침에 대한 기억은 없어도
가볍게 읽을 만한 것으로 혹시 뭐 없을까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을 맨 윗칸에서부터 찬찬히 훑어 내려갔습니다.
권말에 있는 김화영의 저자 인터뷰를 빼고 나면, 삼백 쪽이 조금 못되는 분량의 산문집 한 권.
이거 적당한데, 싶어서 꺼내어 펴들었고 곧 소파에 기대어 편한 자세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내가 텔레비젼에서 '한눈에 반하기'에 대한 인터뷰를 하고 나자, 가수 기 베아르(Guy Beart)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만나면 금방 그를 알아볼 때, 운명적인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노래의 경우도 마찬가지죠. 처음 듣는 노래인데 이미 아는 노래인 것만 같이 느껴질 때 큰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 미셸 투르니에(Michel Tournier)의 산문집 외면일기(Journal Extime)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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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면일기 |
그런 노래?
저한테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중에서 골라보라고 하면,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이 노래입니다.
CD를 사서 처음 들었을 때 그전까지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도 이미 아는 노래 같았고,
듣자마자 바로 ― 아…, 정말 좋다! ― 싶었던 노래, 旅の途中(Tabi no Tochuu, 여행 도중).
正気な言葉をポケットに入れて
진심인 말을 호주머니에 넣고
たまにはふり返る 旅の途中
가끔씩은 돌아다본다 여행 도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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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日月ロック |
노래는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 노래 말고도 여럿 떠오를 것 같은데, 사람의 경우는… 어떤가요?
 | 한 번도 본 적 없던 사람인데 시야에 처음 들어온 그 순간, '이 사람이다!' 싶어 심장이 쿵쾅거린 적이 있나요?
그를 특정지어 소개받거나 한 것도 아니고 우연히 그와 마주쳤거나 또는 먼 발치에서 눈에 띄었을 뿐인데.
그렇게 시작된 '운명적인 사랑'을 해본 적이 있거나…, 혹시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나요?
이성을 향한 '운명적인 사랑' 말고 다른 경우의 사람도 있겠지요.
학교나 직장에서 또는 늘 다니는 길목에서 처음 마주친 누군가에게서
조만간 그와 가까워질 것 같다는 느낌을 (특별한 이유도 없는데도) 강하게 받았던 적이 있나요?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처음 마주쳤던 그때 그 느낌 그대로 그 사람과 친해져서
지금은 그 사람이,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힘들 때 위안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선생님이,
따끔하지만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는 선배가, 또는 당장은 어설퍼도 미래가 기대되는 후배가 되어있나요?
그런 '운명적인 사랑'이, 또는 그렇게 시작되었기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 친구, 선생님, 선후배가 있나요?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도 만나면 금방 그를 알아볼 때, 운명적인 사랑이 생기는 것입니다.」
철없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돌이켜 봐도 그런 장면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저는 그렇게 첫 마주침부터 '운명적인 사랑'은 겪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이성을 향한 사랑 말고라도, 이 사람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느낌을,
첫 마주침에서 바로 가져본 경우의 만남도 없는 듯 싶구요.
보통은 대부분 저처럼 그럴 거라고 생각듭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그런 만남은 그리 흔치 않을테니까요.
미셸 투르니에의 책이 꽂혀있는 책꽂이의 주인인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의 경우를 떠올려보면,
제가 그 친구를 처음 본 날이 언제인지 대충은 기억하지만, 그날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습니다.
사실 그날이 언제인지 조차도 그 친구와는 무관하게 그 즈음의 다른 기억 덕분에 대충이나마 기억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그 친구를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한 어느 날의 이미지는 세월이 꽤 지났어도 머릿속에 또렷하게 그려집니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말을 트고 지낸 것이 봄이었는데, 그 해 겨울 들어서려던 즈음의 어느 날,
서류 제출를 위해 복도에서 줄 서있었을 때 한 사람 건너 제 앞에 있던 그 친구의 뒷모습. 그의 긴 머리칼. 얼굴의 옆선 약간.
「사랑하는, 나의, 오랜 친구」와의 첫 마주침에 대한 기억은 없어도
그래서 그날 그 복도에서의 이미지가 마치 첫 마주침처럼 느껴지는 저에게, 그 친구는 '운명적인 사랑'이나 다름없습니다.
腕からませた 弱いぬくもりで
팔 휘감기게 했던 약한 따스함으로
冬が終わる気がした
겨울이 끝나는 느낌이 들었다 |
두 해 전엔가 제가 '절친'이라는 신조어를 언급하면서 썼던 글에서 얘기한 친구의 경우를 떠올려 보면,
그 녀석하고는 처음 한동안,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서 마주쳐도 서로 눈인사만 주고받을 정도의 데면데면한 사이였습니다.
누군가가 굳이 나서서 소개해주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 정도는 일찌감치 알게 되는 환경이었는데
한편, 도리어 그런 환경 속에 있었던 바람에 어쩌다 시간이 흘러버리고 나면 자칫 친해질 기회가 사라질 수도 있었지요.
알게 된 세월로 꼽아보면 제게는 가장 최근의 친구에 속하는 그 친구와 지금처럼 이렇게 친하게 될 줄, 그 때는 짐작도 못했습니다.
합정역에서 지하철을 환승해서 한강을 건너가던 그 당시 제 귀갓길에서의 어느 이미지 하나가 제 기억 속에 있습니다.
합정역 지나 지상 구간으로 올라온 전차의 차창 너머가 환해져서 문득 눈길을 돌릴 때, 가끔 눈에 띄던 그 녀석.
전차의 출입문 근처에 기대서서 차창 밖의 한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 친구의 옆모습. 말갛게 느껴지던 무표정.
'절친' 즉,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친한 친구」인 그 친구와의 첫 마주침에 대한 기억은 없어도
그래서 그날 전철 안에서의 이미지가 마치 첫 마주침처럼 느껴지는 저에게, 그 친구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 친구입니다.
ⅱ : 스핏츠 팬들을 위한 덧붙임
스핏츠의 노랫말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둘 있는데요.
그 중 하나는 プール(Pool, 풀)의 첫 대목이구요.
君に会えた 夏蜘蛛になった 널 만날 수 있었다 여름거미가 되었다 |
또 하나는 바로 이 노래, 旅の途中(Tabi no Tochuu, 여행 도중)의 첫 대목입니다.
君はやって来た あの坂道を 너는 다가왔다 저 언덕길을 |
각각의 노랫말 전체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야 어떻든
저는 이 두 노랫말의 맨처음 한 줄 만으로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집니다.
プール(Pool, 풀)의 그 대목에서는 '내가 너에게 다가가는 기쁨'을,
旅の途中(Tabi no Tochuu, 여행 도중)의 그 대목에서는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기쁨'을,
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지요. | 
名前をつけてやる

放浪隼純情双六 Live 2000-2003 |
대중 음악의 형식을 주부, 후렴부 등의 배치를 두고 살펴보면 보통 'A A B A'의 형식일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 곡 중간의 간주 부분은, 후렴부에 해당하는 'B' 다음에 'A'의 멜로디로,
또는 보컬 파트까지 포함해서 'A A B A'를 한 번 마치고 다시 'A'의 멜로디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A A B A'의 형식인 이 노래, 旅の途中(Tabi no Tochuu, 여행 도중) 역시 그렇습니다.
전주가 나온 다음 보컬이 포함된 'A A B A'가 연주되고 'A'에 해당하는 간주, 다시 보컬이 함께 하는 'B A' 그리고 마지막 후주.
이렇게 진행되는 이 노래, 보컬이 잠시 쉬어가는 간주 부분에서 여느 노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나는데요.
대부분의 노래는 이 간주 부분에서 주로 기타 파트가 주된 역할을 합니다. 기본적인 포맷의 록밴드의 경우는 거의 다 그렇지요.
피아노 등 건반 악기가 전면에 나서는 경우도 제법 있는데, 아무튼 간주 부분에서는 멜로디 악기가 주된 역할을 하는 거죠.
하지만 旅の途中(Tabi no Tochuu, 여행 도중)의 간주에서는 특정 멜로디 악기가 전면에 나선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아르페지오 연주의 기타라든지 멜로디 악기들의 연주가 보컬 파트가 나오는 부분에서의 백업 연주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그 바람에 간주가 마치 전주 부분처럼 느껴지면서 그냥 지나치기 쉽고 도리어 리듬 악기인 베이스 연주가 돋보입니다.
君はやって来た あの坂道を
너는 다가왔다 저 언덕길을
駆けのぼってやって来た
뛰어올라 다가왔다 |
네가 나에게 다가오는 기쁨.
그 두근거림.
간주의 후반, 그 몇 초 되지 않은 짧은 순간.
하이 프렛으로 짚어 올라가는 베이시스트 타무라 아키히로(田村明浩)의 연주.
마치 우리를 향해 빙긋 웃으며 눈짓으로 이런 말을 해주는 듯한 베이스.
'두근거림, 그것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라고. |  |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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