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나는
이것은 특별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흔한 이야기라고 말하자니 그렇게까진 아닌 듯 싶고, 그렇다고 드문 사랑의 이야기도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이 정도의 이야기 쯤은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테니까.
그리고 흥미진진한 사랑 이야기도 아니다.
도입부가 영화의 한 장면 같다거나 드라마틱한 전개가 있는 사랑 이야기라면
나에게는 이것 말고도 여럿 있다.
하지만, 어쩌면 밋밋하게 들릴 수 있고 그다지 재미도 없을 듯한 사랑 이야기를,
게다가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랑 이야기일 뿐이라서
갈등이나 위기 같은 것은 고사하고 별다른 전개조차도 없는 사랑 이야기를, 나는 하고 싶다. | 
フェイクファー |
이 이야기에 나오는 두 사람이 서로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했는데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의 스침에 내가 괜히 안타까워 했고 그들의 엇갈림에 때로는 나까지 한숨을 내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그 두 사람 말고는 그리 특별하지도 궁금하지도 않을 듯한 이 사랑 이야기를 내가 꺼내고 싶은 것 같다.
ⅱ : 여자는
그를 이성으로 좋아한 것은 정말 오래 전의 일이었다.
드라마나 영화처럼 특별한 계기가 있었거나 첫눈에 반했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던 듯 싶은데
그래도 이성으로 느끼기 시작한 것은 그를 알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같은 강의실에서 그와 함께 수업을 듣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늦봄,
교내 행사로 교정이 북적이던 그 즈음에 이르러서는 주위의 가까운 친구들도 알았을 정도니까.
'그를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이쪽에서 미소를 보내면 그는 아이처럼 환하게 화답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  |
게다가 그 즈음 그의 시선은 다른 사람을 향해버렸고 그런 채로 계절은 여름을 지나치고 가을을 보내고 또 한 해를 넘기고 있었다.
따지고보면 이쪽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난 것이 없었다. 속을 태웠다고 해도 그냥 혼자 그러다 만 것일 뿐 아무도 몰랐다.
그가 시선를 다른 사람과 마주하고 있는 동안, 아마 '이제 더 이상은 아냐'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아무튼 아무 일도 없었던 셈이었다.
다시 새학기가 되었을 때 강의실에서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그해 사월, 그가 논산훈련소에 입소하던 날.
그에겐 알리지 않은 채 환송 '서프라이즈'를 하려고 친구들과 함께 아침 일찍 논산으로 갔다.
거기까지 올 거라고는 생각치 않은 친구들을 보게 된 그는 놀라워했고 고마워했다.
깎아 놓은 밤톨 같은 머리의 그를 중심으로 모두 함께 폴라로이드 사진도 찍었다.
입소 행사가 끝나자 행진 대열 끝에 있던 그는 연병장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졌고
이쪽은 여전히 클래스메이트 또는 좋은 동생인 채로 서울로 돌아왔다. |  |
가끔 그와 콜렉트콜 통화를 하는 친구가 간간히 그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처음에는 이병 ○○○, 곧 일병 ○○○이 된 그의 소식을.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대 배치받은 그를 보려고 언젠가 한 번 친구들과 함께 면회를 간 적도 있는데
군대 얘기 밖에 할 줄 모르던 그 시절의 그 앞에서 재미있는 듯 깔깔대기도 하고 군부대 안의 식당에서 함께 삼겹살도 먹었다.
그에게 있어 이쪽은 아직도 클래스메이트 또는 좋은 동생이었고, 그 즈음에 와서는 이쪽 스스로도 이미 그랬는지도 몰랐다.
그는 그냥 클래스메이트 또는 친남매처럼 편안한 오빠일 뿐. 이미 그렇게 바뀌었는지도.
아니면, 그가 어떻든지 이쪽은 '처음 그 마음 그대로'일 수도 있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시선을 마주하고 거기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이쪽은 이제 더 이상 특별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하는 자리든 다른 친구들이 그를 언급하는 자리든, 장난기 섞인 대꾸를 하거나 별 관심없는 듯 했으니까.
하지만 그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주위의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모습만 그랬을 뿐, 스스로의 마음 속은··· 과연 어땠는지.
그러니까 이쪽은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랫말과 같은 심정일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 두 사람 다 들어본 적이 없는 노래였겠지만.
いつも仲良しで いいよねって言われて
でもどこか ブルーになってた あれは恋だった |
언제나 친구로 지내도 되지 라는 말을 듣고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우울해졌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
ⅲ : 남자는
그가 남몰래 시선을 주었던 사람도 있었고 한편 그가 누군가로부터 고백을 받는 경우도 몇 차례 있었다.
비록 잠깐이긴 했지만 누군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만 마음 아파서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로부터 거의 공개적이다시피 한, 적극적인 고백을 받고 사귀기도 했지만
사랑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 결국에는 마음의 상처를 입고 한동안 힘들어 하기도 했다.
예상치 않은 고백으로 만남이 이루어졌다가 급작스럽고 일방적인 헤어짐으로 망연한 경우도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사귀고 있지 않은 나날도 있긴 했지만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 |  |
꽃이 피고 세상이 초록으로 가득했다가 가을이 오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눈이 내리고, 그러기를 거듭해서 또 눈이 내리고 그랬다.
한편 그는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휴학을 하고 또 누군가를 만났다가 군인이 되고 휴가를 나오고 헤어지고 그러다가 제대했다.
군복무를 하는 동안 다른 동기들과 함께 면회도 오고 편지도 몇 차례 보내준 클래스메이트 여학생이 있었는데
고맙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다른 동기들보다는 편하게 말 건넬 수 있는 여학생, 착하고 재미난 동생 정도일 뿐이었다.
특별한 감정이 생기거나 그러진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고 그 당시도 여전히 그에게는 그랬다.
 | 몇 해 전이었던가, 그 여학생이 자신을 이성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적도 있었고
단짝처럼 함께 다니던 동기에게서 '쟤, 너 좋아하는 것 맞다니까! 넌 쟤 어때?'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일과가 없는 주말 오후의 군부대에서 통화를 할 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바깥 소식 중에는
그 여학생의 일상에 대한 이야기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얘기를 전해주는 동기가 그 여학생과 친하니까 그랬을 거라고 당연한 듯 생각했는데, 아무튼 그랬다.
그런데도 그 여학생은 여전히 동생 같았다.
함께 면회도 와주고 했던, 친하게 지내는 또래의 다른 여학생과 똑같은 느낌은···, 분명 아닌 듯 했지만. |
何度も口の中 つぶやいてみた
かすかなイメージだけを 追い求めてた |
몇 번이나 입안 중얼거려 봤던
희미한 이미지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
막 제대한 참이라 제 딴에는 각오가 서있던 어느 날 그리고 일자리가 만만치 않다는 걸 느끼며 면접을 보러갔던 어느 날.
군에 있던 시절 콜렉트콜 통화를 늘 받아주던 동기에게 이런 얘기를 들었다.
「공부, 여자친구, 일해서 돈 버는 거··· 그거 각각 따로따로가 아냐, 하나를 손에 쥐기 위해 다른 하나를 미뤄두고, 그런 게 아냐」
하지만 지갑을 펼치면 '군필자'임을 굳이 증명해주는, 그저 기념품에 지나지 않는 전역증 한 장 뿐이었다.
금융위기니 뭐니 해서 세상이 어려워졌다고들 하는데 잘 모르긴 해도 일자리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틀림없었고
돌이켜보면 변변한 자격증 하나도 제대로 갖춘 게 없었고 조만간 성취하겠다고 설정해둔 구체적인 목표 같은 것도 딱히 없었다.
그저 막연히 공부를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무엇보다 돈을 빨리 많이 벌고 싶다는 생각 정도 뿐이었다.
여자친구도 사귀고 싶었지만 주머니 사정도 여의치 않은데 여자친구 사귀는 것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랬는데.
ⅳ : 그들은
그랬는데, 갑자기 정말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불꽃 일어난 것이 누구의 가슴인지 그 불꽃이 어떻게 옮겨 붙었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는 이랬다.
알고 지낸 지 이미 몇 해나 되는 클래스메이트, 군인 시절에 면회를 와주고 편지를 보내주었던 그 여학생.
편안하고 착하고 재미나고 친동생 같기도 하던 그 여학생에게, 특별한 감정이 생겨났다.
여자는 이랬다.
한때 이성으로 느껴져서 좋아했던 적은 있지만 오래 전에 그런 감정이 다 사라졌다고 생각되었던 그.
그를 향한 특별한 감정이 사라졌다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꾹꾹 누르고 기다려온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 문자메세지가 오가고 몇 차례 전화를 주고받고 단둘이 직접 만난 것은 두 번 정도, 그 뿐인데
그리고 그런 소통의 날짜를 꼽아봐도 고작 일주일 정도 밖에 안되는데
게다가 그 정도의 문자메세지, 통화, 만나서의 대화 정도는 이번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던 것 같는데.
그런데 이번에는 무엇인가 느낌이 달랐다.
누가 먼저 문자를 보냈는지 어느 쪽이 먼저 전화했는지 어땠는지, 그런 것까지 꼽아보기 시작했고
문자메세지의 응답 속도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한편 스스로는 가슴 졸이며 그 속도를 조절하기도 했다. |
중간고사, 집안 일, 공부, 일자리 알아보기··· 평소에 우선 순위로 두고 있던 것들이 뒤죽박죽되는 듯 했고
나머지 세상사에는 잠시 관심의 스위치가 꺼졌다. 아니, 세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두 사람 다.
ⅴ : 사랑은
사랑의 시작은 그런 것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그런 것들이 모호한 것이기도 하다.
그냥 넋을 잃는 것이다.
그렇게 넋을 잃게 되는데는 일주일이면 충분한 만큼 엉뚱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사랑이다.
サンダル履きの 足指に見とれた
小さな花さかせた あれは恋だった |
샌들 신은 발가락을 넋 잃고 봤었다
자그마한 꽃 피웠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
| 
● 仲良し 노랫말 살펴보기 |
스핏츠도 이렇게 노래하지 않는가.
샌들의 트인 앞코에 가지런히 드러난 발가락을 무심코 내려다보다가도 넋을 잃고
그 발가락이 살짝 꼬무락거리기라도 할라치면 그 순간 활짝 피어나는 꽃을 느낀다고.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런 것이다.
ⅵ : 그래서 나는
아마 그들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과잉 상태에 급격히 빠져들던 그 일주일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그들 사이에 있던 나는 약간의 시차를 두고 양쪽으로부터 재미있는 (놀랍게도 비슷하기도 한!) 문자메세지를 받았다.
여자는 나한테서 그를 「빌려가면 안될까···」라는 문자메세지를, 그럴듯하게 수줍음을 꾸민 듯한 뉘앙스를 담아 보냈고
남자는 나한테서 걔를「빼앗는 게 아니다ㅋ」는 문자메세지를, 폭소의 이모티콘을 앞뒤로 가득 섞어서 보냈다.
우리 세 사람끼리의 말장난을 빌려서 말하자면,
나는 '여자가 나한테서 그를 빌려가는 편'보다 '남자가 나한테서 걔를 빼앗아가는 편'이 더 좋았다.
굳이 고백하는 장면의 모양새를 따져볼 것도 없이, 남자가 여자에게 먼저 고백하는 것이 훨씬 멋진 장면이니까.
그래서 - 어떤 식으로든 이제 막 시작될 그들의 사랑이긴 하지만 - 내가 잠시만 살짝, 조심스럽게 끼어들기로 했다.
.
.
드디어 오늘, 남자가,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여자에게, 고백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자가 빌려간 것이 아니라 남자가 빼앗아간 것이다. ^^ 그렇게 사랑이 시작되었다. ♡
ⅶ : 스핏츠 팬들을 위한 덧붙임
● 열기

運命の人

仲良し | 仲良し(Nakayoshi, 친구).
연주시간 2분 41초. (싱글 부클릿 표기는 2분 40초)
1997년 11월 27일 발매, 2000년 6월 28일 맥시 싱글 재발매.
17번째 싱글 運命の人(Unmei no Hito, 운명의 사람) 커플링 곡.
1998년 3월 25일 발매, 2002년 10월 16일 리마스터링 재발매.
8번째 정규 앨범 フェイクファー(Fake Fur, 페이크 퍼) 5번째 트랙.
쿠사노 마사무네(草野正宗) 작사 작곡.
스핏츠 & 타나야 유우이치(棚谷祐一) 편곡.
타나야 유우이치 어쿠스틱 피아노. | 
フェイクファー |
앨범 수록곡은 먼저 발매된 싱글 수록곡과 같긴 하지만 기타 사운드의 채널을 좌우 반대로 배치했다고 한다.
1997년 발매의 싱글과 1998년 발매의 앨범에 수록된 仲良し(Nakayoshi, 친구)의 기타 사운드.
이어폰을 끼고 싱글과 앨범을 번갈아 들어보면 정말로 그 좌우가 반대로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과 2002년의 재발매 음반의 경우는, 음반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 미확인)
혹시 레코딩 엔지니어 미야지마 테츠히로(宮島哲博)의 실수였던 것은 아닌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실은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단순히 '놀이' 삼아 그렇게 채널 좌우를 반대로 배치해본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 글에 백업되는 것은 앨범에 수록된 곡인데 이어폰 좌우를 반대로 끼고 듣는다고 생각하면 싱글 음반과 똑같은 사운드다.
√ 仲良し 노랫말(우리말 번역)의 출처는 (c) spitzHAUS 입니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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