何処へ行こう Doko e Yukou 어디로 가겠지 |
ⅰ : 비정규직, 삼학년 그리고 휴학생
'저녁에 돈부리(丼) 어때?'라고 청하는 그의 전화에, 둘이서 홍대앞의 어느 덮밥집으로 갔습니다.
일본식 덮밥인 '돈부리'를 즐기는 그 친구와 저는 밥과 소스를 추가 요금없이 더 청할 수 있는 그 가게를 가끔 들리는데요.
튀김덮밥인 '텐동(天丼)'을 주문한 그날도 둘 다 밥은 몰론 장국까지 추가로 청해서는,
오동통한 새우 튀김을 먹을 때의 아삭한 느낌과 텐동 소스의 맛은 물론 충분히 배부르다는 포만감까지 즐겼습니다.
곧바로 커피숍으로 들어가기에는 배가 너무 불러서 홍대앞 골목을 어슬렁거리며 배를 꺼뜨리다가
군에서 제대한 후 내년 봄에 졸업반으로 복학을 앞두고 있는 녀석 한 명을 만나서 잠깐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비가 내릴 기색은 없어도 젖은 바람이 불어 시원한 느낌의 그날 밤,
우리 둘은 그 일본식 덮밥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너츠 가게로 자리를 옮겨 테라스 쪽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가 다니는 직장에서의 이런저런 일들, 우리 두 사람과 친하게 지내는 또 다른 친구의 근황 등을 얘기하다가 문득 깨달았습니다.
특단의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앞으로 일 년 육 개월 쯤 지나면 이 친구도 저 친구도 어떤 전환점에 서게 된다는 것을요.
올해 삼월부터 어느 대학의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그는 내년 연말이면 이 년의 계약 기간 만료를 앞두고 새 직장을 알아봐야 할 테고
지금 대학 '삼학년'인 또 다른 친구도 그 즈음이 되면 취업이라는 여러 갈래 길에서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목을 찾아야 할 테고
홍대앞 어느 주점에서 야간 알바를 하던 그 '휴학생' 녀석도 그때쯤엔 졸업식만 남긴 복학생으로 자기소개서를 고쳐 쓰고 있을 테니.
그러니까 앞으로 일 년 육 개월 쯤 지났을 즈음,
그들 세 사람이 각자 새롭게 들어설 길목은 어떤 길의 초입일런지.
그 즈음에 이르러서도 어디로 들어서야 할지 두리번거리는 모색 단계를 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아니, 여전히 컴컴한 밤중 같은 시절이 계속되는 바람에 막힌 골목길 앞에서 허둥대지나 않을지.
잠시 한눈 팔면 곧 닥칠 미래를 두고 희망적인 관측은 쉽지 않고 어쩌다 걱정 쪽이 더 큰데
그것은 지금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이 시절이 몹시 힘들기 때문에 그럴테지요. |  |
몇 발자국 떨어져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 동안의 페이스대로 꾸준히 나아가기만 하면 기본 이상은 해낼 듯 싶기도 한데
말이 쉬워서 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것이지 사실은 만만찮고 실제로는 '아무 일 없는 지금'에 안주하고 있는 측면도 있지요.
明日の行く先を僕等は考える
誰もが誰よりも一番悩んでる |
내일 어디로 갈지 우리들은 생각하지
누구나가 누구보다도 먼저 고민하고 있지 |
'비정규직'인 그 친구.
취업 환경이 좋아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데다가 취업에 필요한 '스펙'도 상대적으로 모자란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는
지금 직장 이후를 생각할라치면 말수가 줄어들고 그의 손 끝에서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가 길게 피어오르지만
방학 중에는 퇴근 시간이 당겨지니까 이른 저녁엔 학원에 다니면서 약한 부분을 보강하겠다는 등, 신발끈을 다시 조이는 모습.
'삼학년'인 또 다른 친구.
자격증·어학연수·토익·공모전·인턴십, 소위 취업 5종 세트 중 한두 개의 어학 자격증을 제외하면 아직 제대로 갖춘 게 없다지만
아마 그 친구 스스로도 모르고 있을 자신의 '캐파' 즉, 수용 역량(capacity)이 제대로 발휘된다면 그런 걱정은 없어지겠지요.
가이드 맵만 제대로 주어지면 자가발전이 가능한 그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자신의 역량을 모른 채 지레 지치지 않기를 바랄 뿐.
'휴학생'인 그 녀석.
군에서 제대를 하고 나와 복학하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가 깨닫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은 듯 했습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계도면은 여태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계절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도 지금 이 시점에서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뭔지 느꼈는지 야간 알바를 관두고 주간 알바를 찾고있다니, 그것은 청신호.
ⅱ : 지금이 인터미션이라면 너무 길어. 이제 그만.
"그럴 때마다 내가 떠나지 못한 건 역시 용기가 없어서일거야."
점장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긴 떠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조용히 남는 데도 용기가 필요하지. 어딘가로 가려고 결정하면 장래가 불안해지고, 남겠다고 결심하면 나중에 떠나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아 또 불안해지더군. 미무라(三村) 군처럼 젊은 나이에는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아, 아니 이런 고리타분한 얘기를 꺼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미안, 미안."
···
···
슌(駿)이 점장의 등에 대고, "뭡니까? 아까 하시다가 만 얘기가?" 하고 물었다.
"아까 얘기?"
뒤를 돌아보는 점장에게 "예, 아까 하시려던 얘기"라고 슌이 중얼거렸다.
"아, 젊었을 때는 무슨 일이든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왠지 인생에서 진 것 같은 패배감이 드는데, 실제로는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더라는 말이지. 이봐, 내 말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미무라 군이라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테니까."
∼ 요시다 슈이치(吉田修一)의 소설 나가사키(長崎乱楽坂) 중에서. | 
長崎乱楽坂 |
그래요, 저도 그랬습니다. 저는 그때 떠나지 못했습니다.
소설 속 인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듯, 제가 그때 떠나지 못했던 것은 저 역시 '용기가 없어서' 였을 겁니다.
···
'비정규직'과 '삼학년' 그리고 '휴학생', 그들의 내일을 생각하고 있으니,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에서 젊은 날의 용기와 결정을 언급하는 어느 대목을 떠올리며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더군요.
일 년 육 개월 뒤 그들 셋은 각자 지금과는 다른 어느 길목으로 들어서려 할텐데, 그렇다면 나는? ···
저금통장의 잔액이 조금 불었거나 또는 제법 줄었거나 정도일 뿐, 아마 지금과 그다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
일이 년 전을 돌이켜 봐도, 지금 나는 그때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살고 있는데. 일이 년이 뭐야, 더 그렇지. ···
그런 생각이 들자, 제 삶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오래 전에, 일찌감치 인터미션에 들어가서는
다음 단락으로 진행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게 되고 또 내일로 이어지려는 건 아닌지, 싶었습니다.
소설 속의 '미무라 군'에게서 '비정규직'과 '삼학년' 그리고 '휴학생', 이들 세 사람이 스쳐 보였고
'용기가 없어서'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점장'에게서는 제 모습이 오버랩되었습니다.
그들 세 사람이 '뭐든 잘 해낼 수 있을' 캐릭터로 느껴진 것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왠지 인생에서 진 것 같은 패배감'을 느끼고 싶지는 않은데. 뭐···, 아무튼. |  |
そのうち忘れてしまうさ
忘れちゃいけないことまで |
멀지 않아 잊어버리고 말지
잊어서는 안되는 것까지 |
그렇다고 제가 여태껏 걸어오던 길을 벗어나 (이제 와서 한참이나 뒤늦게) 다른 길을 찾아 나설 형편은 못됩니다.
지금은 적어도 '용기'의 문제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제가 지켜야 할 가치는 지금 제가 서있는 이 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뭔가 개운하지 않는 것이···, 앞서 얘기한대로 '점장'의 모습에서 저 자신의 어느 일면이 느껴져서일테죠.
ⅲ : 이러니 저러니 에둘러 얘기했지만 사실은 제 자신을 향한 자극
으음··· 그래요, '비정규직'인 그 친구니 '삼학년'인 또 다른 친구니 '휴학생'인 그 녀석이니 하며 에둘러 얘기했습니다.
그들의 내일은 어떨까 걱정하는 것은 그들을 향한 제 감정의 한 모습인 한편 제 자신을 향한 은근한 자극이기도 합니다.
'떠나는 정도까지는 아니라도 말이야, 성취감 같은 것을 작게라도 느껴보고 싶지 않아?'라면서 제 옆구리를 툭 치는 듯한.
안정적인 생활을 위한 경제 활동과는 별도로, 그러니까 돈을 벌어주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에게는 의미가 있는 것.
주위 사람들에게는 비록 치기어린 짓거리로 보여지겠지만 스스로는 가슴 뿌듯하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
다른 사람들 보기에 가당찮고 스스로에게도 대단찮은 것이라도 작으나마 의미가 있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이참에 남몰래 「그래, 그거 한 번 해보자」 싶습니다. 은근한 자극을 받은 덕분에 말입니다.
'비정규직'과 '삼학년' 그리고 '휴학생' 그들이 각자 원하는 길목으로 들어설 즈음
조금 쑥스럽기는 하겠지만 어깨를 으쓱 추어올리면서 '나, 이런 거 이 정도는 해'라고 말할 수 있도록.
ⅳ : 내일 어디로 갈지 우리들은 생각하지
● 덧붙인 음악에 대한 이야기, 열기
칸쟈니 에이토(関ジャニ∞) 같은 아이돌 그룹도 좋아하고 소울풀한 스가 시카오(スガシカオ)도 즐기는 등,
음악 취향의 스펙트럼도 넓고 TV 예능 프로그램도 즐겨 보는, 일본의 대중 문화에 익숙한 대학 동기가
제게 사이토 카즈요시(斉藤和義)라는 뮤지션을 두어 차례 강력하게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 전 북오프 서울역점에 들리니 진열된 중고CD 중에 마침 그의 앨범이 한 장 있길래 바로 샀습니다.
1996년 2월 28일 발매 사이토 카즈요시의 4번째 스튜디오 앨범, FIRE DOG.
귀에 제일 먼저 들어온 곡이 바로 이 곡, 何処へ行こう(Doko e yukou, 어디로 가겠지) 입니다.
어쿠스틱 기타와 일렉트릭 기타 각각의 리듬 스트로크 등이 잘 어우러진 업 템포의 곡인데
만약 제가 악기 연주를 잘 할 수 있다면 밴드 합주로 연주하면 멋지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
이 노래는 싱글로 발매된 적도 없으며 일본의 노래반주기에도 없다고 하니 일본에서도 많이 알려진 곡은 아닌 모양인데요.
일본어 사전을 들고 부클릿을 펼쳐서 노랫말이 어떤 내용인지 더듬더듬 살펴보니까 시니컬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여러군데 있고
제 수준에서는 몇 번을 다시 읽어도 난해하기만 해서 알쏭달쏭한 대목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偉い人よりも賢くうまくリンゴを食べる |
훌륭한 사람보다도 영리하고 맛있게 사과를 먹는다 |
'사과(リンゴ)'라는 표현에 제가 모르는 메타포가 숨어있나··· 갸웃거려도 봤지만, 아무튼 노랫말 전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何処へ行こう
明日の行く先を僕等は考える
それより誰よりも今夜を楽しもう
人の噂よりも早く うまく夜空を泳ぐ
そしてまた忘れてしまう 嗚呼
明日の行く先を僕等は考える
誰もが誰よりも一番悩んでる
偉い人達は賢く光の中を泳ぐ
そしてまた忘れてしまう | 僕等は愛とか恋とか 勝った負けたで忙しい
誰かが涙流したら 僕も泣いてる振りをする
そのうち忘れてしまうさ
忘れちゃいけないことまで
誰かが何とかするだろう
そしてあなたは何処へ行く?
偉い人よりも賢くうまくリンゴを食べる
そしてまた忘れてしまう 嗚呼
明日の行く先を僕等は考える
誰もが誰よりも一番悩んでる | 
斉藤和義
FIRE DOG
1996-02-28 |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사이토 카즈요시의 팬이 혹시 있다면 도움 될까 해서, 부클릿에 나와있는 퍼스넬을 덧붙입니다.
작사 · 작곡
편곡 |
사이토 카즈요시
사이토 카즈요시, 미야우치 카즈유키(宮内和之) |
사이토 카즈요시
오쿠보 아츠오(大久保敦夫)
오가와 신지(小川真司)
이시자카 카즈히로(石坂和弘)
노자키 타카로(野崎貴朗) |
보컬, 어쿠스틱 기타, 커팅 기타, 피아노, 오르간
드럼
일렉트릭 베이스
리드 기타
오르간, 컴퓨터 프로그래밍 |
+
이 곡은 최근 제가 가장 즐겨 듣던 노래 중의 하나이기도 하고
(마음에 쏙 드는 뮤지션을 추천해준 バキちゃん、고마워!)
'비정규직'과 '삼학년' 그리고 '휴학생' 그들과 제 자신의 내일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기회를 주기도 해서
오랜만에 스핏츠(スピッツ) 관련 포스팅을 잠깐 멈추고 이 글에 덧붙여 봤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싶네요.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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