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 지난 오월의 부음(訃音)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먼 발치에서 바라본 적조차 없는 사람이라 해도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그 분이 저의 가족이나 친지가 아닌데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많은 이들에게는 얼마 전 연이어 세상을 뜬 두 분의 전직 대통령들의 경우가 그러했겠지요.
 | 올들어 접한 부음 중에 제 가슴을 휑하니 만들었던 것은 김수환 추기경과 장영희 선생의 부음이었습니다.
두 분 중 장영희 선생은, 뉴스 밸류만으로 따지자면 추기경이나 두 전직 대통령 만큼은 아니었으니
지난 오월에 접했던 그 분의 부음에 별다른 관심없이 지나쳤거나 이름조차 생소한 사람도 많겠으나,
어릴 때부터 소아마비 장애를 가진 채 살아왔으며 세 종류의 암과 투병 끝에 세상을 등졌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차근차근한 어투와 따뜻한 느낌으로 희망의 메세지를 건네주고 떠난 장영희 선생의 부음은
제 경우, 전직 대통령 두 분의 부음보다 묵직하게 다가와 가슴을 휑하게 만드는 부음이었습니다. |
에세이로 분류되는 책은 제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서 서점에 가도 그쪽 서가는 그냥 지나쳐 버리는데요.
하지만 저희 집 책꽂이에는 장영희 선생이 쓴 에세이, 세 권이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내 생애 단 한번』, 『문학의 숲을 거닐다』 그리고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세 권에 수록된 글 모두가 각각 쉽게 읽히면서도 울림은 가슴에 오래 남는데,
아마 어린 시절부터 안고 온 신체적 장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에게는 긍정의 메세지를 전해주는 그의 글을 통해서
그동안 모르고 지나쳤던 우리 자신의 정신적 장애 즉, 마음가짐의 장애를 독자들에게 발견하게 만들어서 그런 듯 싶습니다.
그런데 저는 은근히 '삐딱선'을 탄 구석이 많아서 '구구절절 옳은 말씀'을 접할 때면 일단 액면 그대로 그걸 수긍하기보다는
'난 그렇게 깨끗한 놈이 애당초 아니고 앞으로도 그렇지 못할테니 적어도 내 입으론 그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아'라든지
'말로는 쉽게 할 수 있지만 다들 그렇게 살지 않잖아 너부터도 사실은 그렇지 않으면서 뭘···'이라면서 속으로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장영희 선생이 평범한 일상의 일화를 통해 조곤조곤하게 건네는 '옳은 말씀'에는 고개를 외로 꼰 채로 있기가 어렵거니와
제 마음가짐에 사실은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슬그머니 드러나게 해서는 스스로 알아채도록 만드니 은근히 불편하기까지 합니다.
ⅱ : 사랑없는 돈, 돈 없는 사랑
"중요한 것은 누구와 함께 있는가이지. 무엇을 먹고 어디를 가는가는 중요하지 않단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언제나 행복할 수 있을 거야. 오직 돈 때문에 지금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 먼 훗날 후회하게 될 거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이것이 수미의 질문 밑에 써놓은 나의 답이었다. 마치 영원한 진리라는 듯, 단어 하나하나가 굵고 힘 있는 필체로 쓰여 있었다.
···
'사랑이냐 돈이냐' ― 무슨 신파극 제목 같지만, 따지고 보면 사랑과 돈은 영원불멸의 인생 주제이다. 선생으로서, 아니 인생 선배로서 수미에게 어떤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수미에게 자신 있게 말했듯이,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
마치 머리에 더듬이가 달린듯, 누구나 돈이 있느냐 없느냐를 즉각 감지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이런 세상에서, 앞문으로 들어오는 가난에 밀려 사랑이 옆문으로 새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
"수미야, 한번 가정해 보자. 아주 돈이 많지만 널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즉 돈 없는 사랑, 사랑 없는 돈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겠니?"
물론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좋겠지만 내 경험으로 보아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내가 수미라면 그래도 나는 사랑없는 돈보다는 돈 없는 사랑 쪽을 택하겠다.
∼ 장영희의 에세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서강대학교 영미어문학 전공 교수였던 장영희 선생은 영작 시간의 과제로 학생들에게 영어 일기를 쓰게 했는데
'남자친구가 있다, 둘 다 너무 가난하다, 가난이 싫어서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어느 학생의 일기를 소재로 한 「돈이냐, 사랑이냐」이라는 제목의 글 중에서 몇몇 부분을 따온 것이 위에 인용한 글입니다.
··· 어떻게 생각하나요?
돈이라는 물질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강조점을 찍는 어드바이스에,
원론적으로는 당연히 동의하지만··· 저는 묘한 불편함을 느꼈습니다.
이 불편함은 앞서 말한, 장영희 선생의 글을 읽으면 제 마음가짐의 장애를 새삼 자각하게 해준다는,
그 긍정적인 자각에서 비롯되는 기분 좋은 불편함과는··· 다른 불편함이었습니다.
 | "아주 돈이 많지만 널 별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 돈은 없지만 널 정말 좋아하는 사람"
'수미'가 뽑을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양 극단에 위치한 선택지, 오로지 그 두 가지 말고는 없는 것일까요?
가난이 너무 싫어서 헤어질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는 '수미'에게
서로 대척점(對蹠點)에 있지도 않는 두 가지의 가치를 병치(竝置)함으로써
(원래 '사랑'과 '돈'은 함께 할 수 없거나 또는 둘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할 배치를 통하여
의도하진 않았다 하더라도 '돈없는 사랑'은 고고함, '사랑없는 돈'은 천박함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 채)
둘 중 하나를 뽑아보라고 하지만 실은 '수미'에게 '돈없는 사랑'이라는 선택지만 길게 내미는 것은 아닌지. |
만약 지금의 남자친구와 헤어진다면, 이후 '수미' 앞에 등장 가능한 캐릭터로 왜 '사랑없는 돈'만 예상하는 것인지.
살면서 만나서 부대끼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는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그 양 극단의 중간에 있을텐데.
경제 능력은 전혀 없고 사랑 밖에 모르는 사람이든, 재테크에는 능하지만 사랑의 감정엔 무덤덤한 사람이든,
어느 쪽이든 그렇게 양 극단에 자리한 사람을 '수미'가 새로운 남자친구로 만날 확률은 도리어 흔치 않을 일일텐데.
'오직 사랑뿐'이라는 태도는 혹시 이미 물질적 토대를 갖추고 있어서 물질적 결핍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돈이 너무 없어서 가난에 진절머리가 나는 사람에게 '돈없는 사랑'이란 헛웃음만 나오는 '감정의 사치'일 수도 있는데.
'수미'를 아끼고 사랑하고 (큰부자는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궁핍하다는 말까지는 아마 듣지 않을 사람.
'수미'가 새롭게 뽑게 될 선택지에 적힌 사람은 이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 않을까? 선택지가 몇 장이든.
"돈과 사랑, 둘 다 있으면 좋겠지만 ···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다.
내가 수미라면 그래도 나는 사랑없는 돈보다는 돈 없는 사랑 쪽을 택하겠다."
가난이 싫어 남자친구와 헤어지려는 '수미'에게 주는 장영희 선생의 어드바이스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인생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선택일 뿐 결코 '둘 다'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동의하지만
돈과 사랑, 이 둘은 서로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온전히 잃어야 하는, 그런 건 아니지 않을까요?
빈곤함과 함께 해야 '순수한 사랑'이고 부유함이 뒤따르면 '때묻은 사랑'일까요?
돈과 사랑은 서로 밀쳐내는 반댓말이 아닌데.
따지고 보자면 부유함의 대척점에는 사랑이 아니라 빈곤함이,
사랑의 대척점에는 돈이 아니라 증오 또는 무관심이 자리하고 있을 뿐인데. |  |
 | '수미'에게 자신있게 말했다는 질문, 하지만 장영희 선생은 스스로에게도 되묻습니다.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어떤가요? 이 껄끄러운 질문에 자신있게 '믿지! 당연하잖아?'라고 대답할 수 있나요?
낮은 목소리로 우리에게 긍정과 희망을 이야기해주면서 맑게만 살다 간 장영희 선생조차도
이 세상을 경제능력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태도를 정하는 세상"으로 (어쩔 도리 없이) 받아들이고
위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묻고 있는 바에야···, 저같은 사람에겐 되묻고 어쩌구조차 필요없지요. |
"나는 정말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가?"
그래요, 저는 돈 없이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누군가와 '함께' 하는 삶이라면 더욱 믿기 어렵습니다.
장영희 선생이 '수미'에게 건네는 어드바이스에 원론적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그리고 돈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라는 것을 강조하고자 그렇게 양 극단의 선택지를 제시했을 거라고 어림짐작하면서도
제가 묘한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앞서 얘기한 그런 상념들이 머릿속에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 어떤가요?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혹시 자신의 연애가 '수미'와 비슷한 상황이라서 힘들어 했던 적이 있나요?
그 고민의 해결책은 어떤 것이었나요?
힘들지만 함께 '오직 사랑뿐'으로 이겨나가고 있는 중인지 아니면 다른 선택지를 뽑게 되었는지.
···
ⅲ : 지금 네가 모르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이 글을 쓰는 내내 제가 반복해서 듣고 있던 노래는
스핏츠(スピッツ)가 지난 해 발매한 싱글인 若葉(Wakaba, 새잎)입니다.
스핏츠의 노래는 모두 쿠사노 마사무네(草野正宗)가 노랫말을 쓰고 있는데
그의 유려한 노랫말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사람에 따라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되기도 해서
스핏츠를 들을 때면 이들의 노래는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한편의 시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요.
혹시 이전부터 이 노래를 알고 있었다면, 若葉(Wakaba, 새잎)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요?
저는 이 곡에서 받은 느낌 중의 하나가 「헤어짐 그리고 새출발」인데요.
제 주위의 청춘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떠올리자 (비록 고민의 배경은 서로 다를지라도)
또다른 '수미'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2008-11-05
スピッツ
若葉 |
若葉
優しい光に 照らされながら あたり前のように歩いてた
扉の向こう 目を凝らしても 深い霧で何も見えなかった
ずっと続くんだと 思い込んでいたけど
指のすき間から こぼれていった
思い出せる いろんなこと
花咲き誇る頃に 君の笑顔で晴れた 街の空
涼しい風 鳥の歌声 並んで感じていた
つなぐ糸の細さに 気づかぬままで
忘れたことも 忘れるほどの 無邪気でにぎやかな時ん中
いつもとちがう マジメな君の 「怖い」ってつぶやきが解んなかった
暖めるための 火を絶やさないように
大事な物まで 燃やすところだった
思い出せる いろんなこと
花咲き誇る頃に 可愛い話ばかり 転がってた
裸足になって かけ出す痛み それさえも心地良く
一人よがりの意味も 知らないフリして
思い出せる すみずみまで
若葉の繁る頃に 予測できない雨に とまどってた
泣きたいほど 懐しいけど ひとまずカギをかけて
少しでも近づくよ バカげた夢に
今君の知らない道を歩き始める | 새잎
부드러운 빛에 비치며 여느 때처럼 걷고 있었다
문의 저쪽 응시하여도 깊은 안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쭉 계속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
손가락 틈새로부터 흩어져 떨어져 갔다
떠올릴 수 있다 여러 가지 일들
꽃피움을 뽐낼 즈음에 너의 웃는 얼굴로 맑아진 거리의 하늘
차가운 바람 새들의 노랫소리 나란히 느끼고 있었다
이어진 실의 가늚에 눈치 채지 못한 채
잊어버린 것도 잊을 정도로 천진난만하게 흥청거리는 시간 속
여느 때와 달리 진지한 너의 '무서워'라는 혼잣말을 이해 못했다
포근히 감싸주려고 불을 꺼지지 않게 하려고
중요한 것까지 태워버릴 참이었다
떠올릴 수 있다 여러 가지 일들
꽃피움을 뽐낼 즈음에 귀여운 이야기들만 굴러가고 있었다
맨발이 되어 내달리기 시작한 아픔 그것조차도 기분이 좋고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자의 의미도 모른 척하고
떠올릴 수 있다 구석구석까지
새잎이 무성해질 즈음에 예측할 수 없는 비에 당황하고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그립지만 우선 열쇠를 채우고
조금이라도 다가갈 거야 터무니없는 꿈으로
지금 네가 모르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 |
 | 아픔조차도 기분이 좋고(痛みさえも心地良く) 중요한 것까지 태워버릴(大事な物まで 燃やす) 만큼
천진난만하게 흥청거리는 시간 속(無邪気でにぎやかな時ん中) ··· 그와의 사랑.
쭉 계속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만(ずっと続くんだと 思い込んでいたけど)
도리어 부서지기 쉬워서 손가락 틈새로부터 흩어져 떨어져(指のすき間から こぼれて) 가는 것이
청춘 시절의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
 | 그와 나 사이를 이어주고 있던 굵은 끈도 어느샌가 실처럼 가늘어져(つなぐ糸の細さ) 버릴테고
어느날 예상치 않게 쏟아지던 비에 당황하던(予測できない雨に とまどってた) 그 순간, 문득 깨닫습니다.
아 ···
새잎이 무성해지는 시절(若葉の繁る頃)이 다가왔다는 것을.
그리고 다름아닌 나 자신, '수미'가 바로 그 '새잎(若葉)'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지금부터 네가 모르는 길을 걸어가기 시작한다(今君の知らない道を歩き始める)는 것을. |
ⅳ : 스핏츠 팬들을 위한 덧붙임
이 노래, 若葉(Wakaba, 새잎)를 만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작사 · 작곡
제작 · 편곡
녹음 · 믹스 |
쿠사노 마사무네
스핏츠, 카메다 세이지(亀田誠治)
타카야마 토오루(高山徹) |
쿠사노 마사무네(草野マサムネ)
미와 테츠야(三輪テツヤ)
타무라 아키히로(田村明浩)
사키야마 타츠오(崎山龍男)
미나가와 마코토(皆川真人) |
보컬, 기타
기타, 만돌린
베이스
드럼
오르간 |
| 
皆川真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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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若葉 노랫말(우리말 번역)의 출처는 (c) spitzHAUS 입니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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