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상담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좀 뭣하고 어쩌다 고민거리 같은 것을 들어주는 일이 가끔 있다.
그럴 경우 그 상대에게 동조나 긍정의 추임새로 토닥거려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위로보다 해결 쪽으로 가닥을 잡아 말을 풀어나가는 바람에 강한 표현이 잇따르고
나도 몰래 도가 치나쳐서 눈물이 쏙 빠질 만큼 막말을 쏘아댈 때도 있다.
나중에 후회가 뒤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이 도무지 고쳐지지 않아서 난감하다.
어쨌든 그들은 제각각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하는데 그 주제를 대충 구분해보자면
진학, 연애, 취업이 그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요즘은 직장생활에 대한 것이 많아졌다.
얼마 전에 만난 어느 녀석은 업무 특성 상 가끔 새벽 네시 반에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데
바이오 리듬은 엉망이 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서 거기에 맞출 수 밖에 없다.
이런 경우 '힘들겠다' 정도의 토닥거림 정도가 최선이다.
'나인 투 파이브'에 '칼퇴근'하는 직장으로 옮기라고 무책임하게 불지를 수는 없으니까.
또 한 녀석은 갑의 입장에 있는 거래처의 일을 도와주러 주말마다 출근할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주말에 친구들과 약속도 못하게 만드는 거래처의 담당자에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그걸 당연하게 여겨서 명령조로 주말 근무를 요구하는 같은 회사 윗사람의 사고방식에 화가 나고
또 몇번 그러다보니 싫으면서도 어느새 순응하고 있는 자신이 싫어진다고 했다.
업무수행 능력 만으로 직장생활이 영위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라서
매끄러운 직장생활을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정치'가 (때론 '꼼수'까지도) 필요하다.
거래처는 물론 사내에서도 을의 입장인 그 녀석도 상처받다보면 저도 몰래 '정치'를 익혀가겠지. |  |
ⅱ
업종의 특성 상 주요 업무는 남자 직원이 주로 담당하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하고도 얘기를 했다.
(그가 다니는 회사의 주요 거래처들은 철강, 발전설비, 석유화학 플랜트 등 한마디로 '이공계' 쪽이다)
그동안 일선 업무는 주로 남자 직원이 하고 일정의 '코디' 등은 여자 직원의 몫이었는데
최근 들어 회사 방침이 업무를 남녀 구분없이 수행하도록 업무 분장이 바뀌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은 과도기라 처우 부분에 있어서는 아직 남성 위주의 과거 관행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유럽계 회사라 그런지 그가 겪는 불공평한 관행도 어쩌면 상대적으로 다소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얘기를 계속 들어보니 당장은 아니지만 조만간 달라질 것 같은 분위기가 회사 내에서 감지되는 듯 싶다.
아직은 사회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직장에서 그가 부닥치는 성 차별은 사소한 것이겠지만
(아··· 글에서 짐작되겠지만 그 친구, 나와는 젠더가 다르다)
특정 업무를 혼자 온전히 맡아서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 책임자가 되는 등 승진을 앞두게 되면
알게모르게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소하지 않은' 성 차별을 예기치 않게 실감하게 될 것이다.
때로는 엉뚱하게 같은 여성이 성 차별의 담벼락으로 그를 막아서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겠다.
그 친구는 어떨까.
지금은 새롭게 부여되는 업무의 전반적인 파악에 바빠서 그런 걸 의식할 겨를이 없겠지만
나중에 발군의 직무 능력을 발휘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거나 고과 평가에 석연치 않은 불이익을 받는 이유가
실인 즉 드러나지 않은 성 차별과 여성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에 기인한 것이라면.
그 친구는 어떨까.
많이 달라졌다 해도 여전히 '이츠 맨즈 월드(it's man's world)'라는 정글에서
그는 오랫동안 시스템에 스며들어 있던 차별과 편견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그래서 언젠가 이른바 '유리 천장(glass ceiling)'을 뚫고 우뚝 설 수 있을까. |  |
그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그에게 시 한 편을 소개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외우고 있지도 못할 뿐더러 설령 외우고 있거나 또는 시집을 눈 앞에 펴놓고 있다 해도
파격적인 시어가 있어서 그의 앞에서 내가 소리내어 읽어줄 수 있을 만한 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시 한 편, 열기
젖이라는 이름의 좆 ∼ 김민정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아,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우-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ⅲ
이번 글에 붙이는 노래는 글 내용과 특별히 관련이 있는 노래가 아니다.
쿠사노 마사무네(草野 正宗)가 노랫말을 쓴 스핏츠(スピッツ)의 노래 중에 이념과 메세지를 앞세운 노래는 없고
노랫말의 분위기에서 은연중에라도 성 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 등을 떠올릴 만한 노래가 있을 듯 싶지는 않다.
그런데도 굳이 스핏츠의 노래, 聞かせてよ(Kikaseteyo, 들려줘)를 이 글에 붙인 이유는
마침 이 노래가 방금 이야기한 그 친구가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라는 것, 그냥 그 이유 하나뿐이다.
● 노랫말, 열기
聞かせてよ ∼ スピッツ
偶然の世界 どう動いたらいいんだろう?
蝶の羽が起こすくらいの 弱い風受けて
小さすぎる窓から 抜け出せる時が来る
言い訳の作法なんて 捨ててしまったし
聞かせてよ 君の声で 僕は変わるから
新しい甘い言葉で 愚かになりたい
そっと触れただけで 消えてしまうかもだけど
臆病なこのままじゃ 影にも届かない
聞かせてよ 君の声で 僕は変わるから
懐かしい苦い言葉で 素直になりたい
そして僕も答えるように つぎはぎしながら
ありふれた愛の歌 歌いはじめる
歌いはじめる
作詞・作曲 ∶ 草野正宗 | 들려줘 ∼ 스핏츠
우연의 세계 어떻게 움직여야 좋을까?
나비의 날개가 젖혀질 정도의 약한 바람 맞으며
작디작은 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때가 와
변명의 작법 따위 버려버렸고
들려줘 너의 목소리로 나는 바뀔 테니까
새로운 달콤한 말로 어리석어지고 싶어
조용히 들린 것만으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지만
겁쟁이인 이대로는 그림자에도 닿지 않아
들려줘 너의 목소리로 나는 바뀔 테니까
그리운 쓰라린 말로 솔직해지고 싶어
그리고 나도 대답하듯 그러모아 하나로 만들면서
흔한 사랑의 노래 부르기 시작할 거야
부르기 시작할 거야
작사·작곡 ∶ 쿠사노 마사무네 |
아마도 지금 이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면서 글을 쓰고 있어서 그럴테지만
러브 발라드인데도 그 친구와 직장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잠깐잠깐 떠오른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에서 말이다.
小さすぎる窓から 抜け出せる時が来る
작디작은 창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때가 와 |
그리고 또 이런 대목에서도.
臆病なこのままじゃ 影にも届かない
겁쟁이인 이대로는 그림자에도 닿지 않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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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とげまる |
ⅳ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어딘가 매너리즘에 빠진 듯해서 이건 아니다 싶을 때가 있다.
한편 매너리즘의 나른함 같은 것에 빠질 틈도 없을 만큼 힘들 때도 있다.
스스로의 역량이 부족하여 주어진 업무가 과중하게 여겨진다든지
또는 앞서 얘기한 것과 같은 차별이나 편견에서 비롯된 스트레스 때문에.
그럴 때 우리는 친구를 만나 각자의 직장에 대한 '뒷담화' 수다를 떨거나
자리를 옮겨 술잔을 기울이며 경직된 시스템에 대한 성토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런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기는 어렵고 자칫 더 쌓이기도 한다. |  |
그래서 직장과 전혀 무관한 방식을 택하여 우회적으로 그걸 이겨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동안 느슨해졌던 취미생활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강화한다거나
퇴근 후 힘들게 시간을 맞춰서 만난 남친/여친과의 짧지만 달콤한 데이트를 통하여
평소 직장생활에서 상처 입은 감정선이 자연스럽게 복구되기도 한다.
친구, 술, 취미생활 그리고 데이트 만큼은 아닐지라도
출퇴근 길에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오는 스핏츠의 노래도
조금은 그 역할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혹시 스핏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앞서의 그 친구도 말이다.
(나만큼은 분명 아닐테지만) 그 친구도 스핏츠의 노래를 좋아하니까.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텐션 업 시켜주는 에너지 드링크 같은 노래.
직장생활에서 받은 상처의 통증을 가라앉히고 새살을 돋게 하는 연고 같은 노래. |  |
聞かせてよ 君の声で 僕は変わるから
들려줘 너의 목소리로 나는 바뀔 테니까 |
ⅴ
아무튼.
올해 하반기에 접어들 무렵 (그때까지 계속해서 그 직장을 다니고 있다면)
그 친구도 이른바 연봉협상이란 것을 하게 될 예정인데
그때쯤이면 다른 건 제쳐두고서라도 일단 지금 그가 느끼는 '사소한 불만' 정도는 해결볼 것 같다.
√ 스트리밍되고 있는 음악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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