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지난번 이사 때 그리고 지지난번 이사 때, 잡지같은 것은 남김없이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또 나온다.
일반 잡지들이나 보통의 단행본에 비해 판형이 조금 커서 그랬는지 아무튼 몇몇 화집들이 꽂혀있던 자리에 같이 있던 것들.
이번에 이사를 한 후 짐을 정리하면서 마음 속으로 결정을 한 것이 있다. 「적어도 하루에 하나는 버린다」
그래서 제일 먼저 손에 잡혀서 버려지게 된 것이 그것들. 그렇게 뒤늦게 발견된(?) 미술 관련 잡지들.
짐 정리를 하다말고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서 한참 뒤적거린 후에 버려지기도 하고, 화장실에 잠깐 들고갔다가 버려지기도 한다.
재활용 쓰레기장에 갖다두기 전에 한번 훑어보던 그 잡지들 중에서 눈길이 잠시 머문 글. 어느 낯선 청년 화가의 글과 그림.
지난 해 어느 고등학교 축제에 들렸을 때 그 학교 문예부의 시화전을 둘러보던 시간이 문득 떠오른다.
바다, 새, 저녁
수평선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솟았다.
내속 어느 한 부분이 위로받을 길 없어
바다처럼 넓은 공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낮게 그림자를 떨구며 날아가는 새의 궤적을
그림자 속에서 지켜보았다.
나의 그림자는 그림자 속에서 고요하다.
무겁게 내려앉은 저녁이었다.
따뜻했던 새의 가슴 털을 헤집는 벌레처럼
저녁 속을 걸어 나갔다.
기억으로 되살아난 풍경들이 옆으로 멀어져갔다.
다가와서 멀어져가는 나무 한 그루
기억처럼 서 있었다.
∼ 안중경의 illustrated essay 풀밭에 별처럼 눕다 중에서 | 
trans trend magazine
2006년 여름호 |
ⅱ
지난 칠월 어느 날, 서로 바쁜 탓에 만난 지가 꽤 된 친구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 이번 여름 휴가를 팔월 초에 잡아서 일주일 정도 해운대로 갈 예정인데, 같이 가자.
― 그래? 그거 좋지. 으음, 근데 이 달 말에 이사가는데 그것 때문에 어수선해서 지금 당장 답을 내기가 좀‥.
― 이사는 이번 달이라며? 부산에 가자는 건 팔월이야, 팔월.
― 실은 팔월 초순에 꼭 치러야 할 행사도 마침 있어서 그래. 하필 아직 그게 날짜가 확정나질 않아서.
― 그래? 알았어. 암튼 같이 가면 좋겠다.
그 친구와 나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과 바닷가에서 왁자하던 지난 날의 분위기가 떠올랐다. |  |
정리정돈이야 쉬엄쉬엄 하면 되는 거니까 이사를 마치면 나도 해운대에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 친구처럼 일주일씩 있다 오는 것은 무리일테지만 이삼일 정도야 뭐. 게다가 이렇게 말이 나왔을 때 가야지 안그러면 가기 쉽지 않지.
이사를 마치고 하루이틀 지나서였나? 또다른 친구에게서 문자메세지가 왔다. 자우림의 샤이닝 한번 들어보라고.
그 친구, 요즘 심정이 그렇다고 했다. 요즘은 잘 듣지않던 자우림. ‥서너 번 연거퍼 들었다. ‥그에게 답신을 보내지 못했다.
ⅲ
박하향은 분명 아니고 뭔가 알듯 말듯한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컴퓨터단층(CT)촬영을 위한 조영제(造影劑)가 손등의 혈관을 타고 들어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사를 마친 그 다음 날부터 배가 조금씩 아프더니 일주일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병원에 들렸다. 주사 한 대 맞고 내복약 처방전을 받아서 나올 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통증이 시작되고 일주일 정도 그저 불편할 뿐이었는데. 그래서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뜻밖의 검사 결과. 맹장염. 곧바로 수술을 해야한다고 했다.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입원 절차가 시작되었다. |  |
단추 하나 없이 끈으로 등 뒤로 묶는 수술복 상의.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제대로 입을 수도 없다. 일반 환자복하고 또 다르다.
반지, 안경은 물론 팬티같은 속옷 한 장도 허용되지 않는다.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난 순간 문득 느낀다. 「이보다 더 무력할 순 없다」
이동하는 베드에서 병원 복도 천장을 향한 싯점으로 빠르게 달리는 것은 영화에서만 익숙한 장면이었는데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은. 쯔.
어지러워서 눈을 감는다. 다행히 멈춘다. 춥다. '잠시만요' 하고 간호사는 어디론가 가버린다. 혼자다.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춥지?
'오늘 정말 피곤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지나간다. 수술실 앞 복도같다. 잠시 후 '전신마취할 겁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
수술실. 너댓명의 의료진들. 여기 원래 추운 건가요? 팔다리를 가볍게 묶으면서 누군가 대답한다. '곧 괜찮아질 겁니다' ‥ 정신, 잃는다.
 | 밤 열시에 시작해서 한 시간 쯤 걸려서 끝이 난 수술은, 수술 그 자체로는 간단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리고 개복 수술이 아니라 복강경 수술이라서 입원 기간도 짧고 회복도 빠르며 흉터도 없다시피 하다해도
그건 메스를 쥔 사람의 얘기지, 맹장인지 충수돌기인지 아무튼 뭔가 잘려나가는 나는, 얘기가 다르다.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실려온 후 마취에서 풀려나기 시작해서 새벽 한시까지 약 두 시간, 정말 고통스러웠다.
나중 전해들으니, 그 때 나는 큰소리로 쌍욕을 해대기까지 했단다. '아, 씨바! 진짜 아파 죽겠다!'고.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는지 또는 잠들어 버렸는지 아무튼 그랬다. 메슥거렸다. ‥ 더이상 생각나지 않는다. |
수술 그 뒤로는 무료하기 짝이 없는 시간들. 병실에서 복도에서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환자들 모두 하나씩 주사 맞고있는 링거액들.
카비벤페리, V/S, 올리클리노멜, D/V 등 이름만으로는 도대체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링거액들이 각자의 몸 속으로 들어가고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베드에 누워 볼륨을 줄인 텔레비전을 통해 막 개최된 베이징 올림픽을 본다. 보는 듯 마는 듯 건성건성.
하지만 그것도 잠깐잠깐 그렇고 다들 설핏설핏 잠에 빠져든다. 나도 그렇다. 나도 스르르 잠든다.
그렇게 얕은 잠에 빠졌다가 깨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꿈을 꾸기도 꾼다. 꿈속에서 바다가 보인다. 언듯언듯.
ⅳ
팔월 초에 해운대에 가자고 친구가 그랬는데, 나는 베드 여기저기 금식 표찰이 붙어있는 병실로 왔다.
그리고는 꿈속에서 바다를 본다. 그것도 엉뚱하게 해운대가 아닌 송정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바다를.
돌이켜보니 해운대에서 살 적에도 가까운 해운대 해변보다는 송정의 해변에 더 자주 갔던 것같다.
해운대보다는 조금 멀지만 한적해서 좋고 해변 테이크아웃 커피도 즐길 수 있고 갈매기도 더 많이 보이는.
明日になれば僕らもこの世界も 내일이 되면 우리도 이 세계도
消え失せているのかもしれないしね 사라져버리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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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海ねこ 노랫말 살펴보기 |
서울 도심 한복판의 어느 종합병원 병실에서 자다 깨다 하면서 설핏설핏 꾸던 꿈. 그 꿈 속에서 언듯언듯 바라보던 바다.
퇴원하고 난 지금, 그 꿈 속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보니 과연 그게 송정의 해변에서였는지 명확하지 않다. 뭐 아무려면 어때.
그것이 송정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맞다고 해도 거기서 몇년 전에 느꼈던 감정을 이제와서 그때와 똑같이 느낄 수는 없을테니까.
오늘과 다른 지난 날의 바다를 생각하니, 문득 예전에 봤던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이 겹쳐진다.
장궈룽(張國榮, Leslie Cheung)은 장만위(張曼玉, Maggie Cheung)에게 말한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1분 동안 함께 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1분을.
이 1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되었으니까.'
장만위의 독백이 이어진다.
'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  |
오후 5시, 해운대 동백섬 쪽에서 바라보는 바다 색깔. 해변 주차장에서 차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바라보던 송정의 바다.
꿈 속에서든 실제로든 그 바닷가의 이미지는 생생하게 떠올라 잊을 수 없는데, 거기서의 나는 어땠는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아직 전신마취가 덜 깼나? 풉! 그냥 스핏츠(スピッツ)의 이별 노래나 듣자. 슬픈 이야기를 신나게 노래하는 스핏츠의 노래를. 볼륨 업!
はじめからこうなるとわかってたのに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알고 있었는데
宝物のありかはわかってたのに 보물이 있는 곳은 알고 있었는데 |
ⅴ
1992년 4월 25일 발매 스핏츠(スピッツ)의 미니 앨범
オーロラになれなかった人のために(Aurora ni Narenakatta Hito no Tame ni).
'오로라가 될 수 없었던 사람을 위해서' 그 네번째 트랙,
海ねこ(Umineko, 괭이갈매기). 연주시간 4분 2초.
● 스핏츠 팬들을 위한 덧붙임 하나.
앨범 부클릿 마지막장에 나와있는, 이 노래의 'ADDITIONAL MUSICIANS' 목록.
라이온 메리(ライオン・メリィ) Hammond Organ,
에릭 미야시로(ERIC MIYASHIRO), 나카자와 켄지(中澤健次) Trumpet,
카기와다 미치오(鍵和田道男) Trombone,
타카노 마사미키(高野正幹), 우에사토 미노루(上里稔) Tenor Saxophone,
요시다 오사무(吉田治) Baritone Saxophone,
그리고 리듬 어레인지먼트는 스핏츠. | 
オーロラになれなかった人のために |
√ 海ねこ 노랫말(우리말 번역)의 출처는 (c) spitzHAUS 입니다.
√ 음악 파일은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첨부되었을 뿐이며 일체의 상업적 목적은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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