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톡에 표시해둔 자신의 상태메세지 중 일본어로 된 것으로 위와 같은 문장도 있다.
(아···, 카카오톡에는 앞의 일본어 문장만 있고 뒤의 한글 표기는 이 글에서 내가 붙인 것이다)
그와는 한달에 한 번 정도는 만나는 친구 사이라서 그의 일상사를 대충은 알고 있기에
이런 애매모호한 일본어 문장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나는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지만
카카오톡에서 그와 연결된 친구 또는 지인들 중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느닷없는 일본어 문장을 앞에 두고 그의 근황이 어떤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을 듯 아니 거의 힘들 듯 싶다.
게다가 이 문장이 스핏츠(スピッツ)라는 일본 록 밴드의 노랫말 중 일부란 걸 알 리가 없을테니 더욱 그럴 거다.
이 친구가 자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올려둔 이 문장은 스핏츠의 甘い手(Amai Te, 달콤한 손길) 노랫말이다.
그는 언젠가 이 노래를 십여 년 윗연배의 직장 상사에게 음원을 USB에 담아 권한 적도 있을 정도이니
이 노래가 그에게 스핏츠 노래 중 '원 톱'에 해당하는 노래인 것이 분명하다.
스핏츠의 甘い手(Amai Te, 달콤한 손길).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의 부클릿에 의하면, 후반부 간주 부분에서 흘러나오는 남녀의 대화는
예전 소비에트 연방의 영화 맹세의 휴가(誓いの休暇)에 나오는 다이얼로그라고 한다.
이 앨범을 샀을 때 부클릿에서 이 내용을 확인하고는 그게 어떤 영화인지 궁금했으나
워낙 옛날 영화인데다가 흑백의 소련 영화이기도 해서 볼 기회가 없을 거라고 포기했었다.
맹세의 휴가는 일본에서 붙인 타이틀이고 영어로는 Ballad of a Soldier라는 것만 확인하고.
그런데 엊그제 일요일.
카카오톡, 상태메세지, 「いつもより明るい夜だった(여느 때보다 밝은 밤이었다)」, 스핏츠.
그리고 맹세의 휴가 또는 어느 병사의 발라드.
그렇게 이어지는 연상작용에 자극되어 관련 텍스트 정도나 살펴볼 마음으로 검색해봤는데,
웬걸! 입력창에 검색어를 넣자마자 그 영화를 바로 감상할 수 있는 링크가 나왔다.
유튜브에 제작사의 채널이 있고 거기에 마침 이 영화가 지난 3월에 올라와 있었던 거다. | 
Баллада о солдате |
● 영화 「어느 병사의 발라드」 또는 「맹세의 휴가」 보기. 85분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영화, 어느 병사의 발라드 또는 맹세의 휴가.
이차 세계대전에 통신병으로 참전한 알료샤.
우연히 적의 탱크 두 대를 격파하게 되고 그 공훈으로 받게 된 6일 간의 휴가.
귀향과 부대 복귀까지의 이동 시간을 빼고나면 실제 휴가 기간은 고작 이틀.
귀향길에 만나게 되는 상이용사, 소녀 슈라, 참전 병사의 가족 등과의 에피소드.
결국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휴가 기간이 모두 소진되어버린 알료샤.
어머니와의 포옹 한 번으로 곧바로 전선으로 돌아가야 하는 아들.
그런 아들을 다시 떠나보내야 하는 길 위에서의 어머니.
그리고 그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는··· 내레이션.
1960년. 부카레스트 영화제 황금늑대상, 샌프란시스코 국제영화제 감독상,
런던 국제영화제 감독상, 테헤란 국제영화제 감독상, 칸느 국제영화제 최우수상 수상.
1961년. 아카데미상 각본상 후보. | 
誓いの休暇 |
반전(反戰) 메세지를 담은 이 영화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넘게 예전에 만들어진 영화라서
요즘의 영화 문법에 익숙해진 21세기의 관객들에게는 장면 대부분이 마치 클리셰 같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덕분에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고 자막도 영어로 되어 있어도 큰 무리없이 감상할 수 있다.
쿠사노 마사무네가 이 영화를 좋아해서 어느 한 장면의 다이얼로그를 편집해서 삽입했다고 하는데
러시아어는 단 한마디도 모르다보니 이 노래에 사용된 다이얼로그가 어느 장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삽입된 부분에서의 인토네이션 정도만으로 조심스럽게 짐작해보자면, 두 개의 장면 정도가 떠오른다.
하나는 열차에 숨어든 슈라가 알료샤에 대한 경계심을 푼 다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기차역에서 헤어질 때 슈라가 '약혼자가 있다고 한 말은 무서워서 그런 것'이라고 알료샤에게 사과하는 장면.
그 둘 장면 중 하나이거나 또는 그 둘 다를 편집해서 삽입했을 수도 있겠는데 (둘 다 아닐 수도)
짐작에 불과할 뿐이므로 러시아어를 잘 아는 사람 또는 스핏츠 내공이 깊은 고수의 확인을 바란다.
꽤 오래 전의 일인데 언젠가 스핏츠 팬들끼리 만나는 어느 모임의 옆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아마이 테'를 '달콤한 손'이라고 하면 그건 좀 곤란하다."
그렇다면 뭐라고 해석해야 좋을지 궁금했으나 그 다음 대화를 듣지 못한 채로 그 모임을 마치고 말았다.
이번 글을 쓰면서 인터넷 여기저기를 클릭해보니
바둑 용어로 '카라이 테(からい手)', '아마이 테(甘い手)' 그리고 '시부이 테(渋い手)'라는 표현들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설마 하니 스핏츠의 '아마이 테' 의미가 바둑 애호가들이 사용하는 의미와 유사한 것은 아닐 듯 싶다.
검색을 조금 더 해보니, 일본의 어느 스핏츠 팬 사이트에 이 노래를 두고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었다.
その手で触れられるだけで癒される手(それを”甘手-あまて-”と呼ぶ)
そんな手の持ち主が何百人かに1人いる、という漫画を読んで、それがモチーフになった
그 손에 닿는 것만으로도 치유되는 손 (그것을 "아마테(甘手)"라고 부른다)
그런 손의 소유자가 몇백 명에 한 명 있다, 라는 만화를 읽고, 그것이 모티프가 되었다 |
어떤 의미인지 와닿긴 한데 이것을 우리말 한두 단어로 표현하기는 역시 힘들다.
'포근한 손길'도 적당하다 싶지만 모티프로 삼았다는 '치유'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듯 싶고
그렇다고 여러 단어를 쓰면 노랫말이 주는 시적 분위기를 망칠 게 틀림없을테니
결국 '달콤한 손' 또는 '달콤한 손길'로 해두고 그 의미를 더 깊게 생각하는 수 밖에 없겠다.
그래서 노랫말 번역은 의역을 되도록 피하고 있는 (c) spitzHAUS의 것을 옮겨 왔다. |  |
어제 오후, '여느 때보다 밝은 밤'이라는 그 친구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는 늘 그렇듯 이렇게 시작했다.
"어디야? 뭐 해? 아니, 도대체 어디서 뭐 하고 있는 거냐구?"
그는 일하던 중에 잠시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워무는 중이었고 나는 다소 번잡한 종로 광장시장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지난 여름 다니던 직장에서 나온 후 프랜차이즈 외식 업종에 뛰어든 그는 남들 쉬는 날 일하고 평일에 쉰다.
얼마 전 늦은 밤 퇴근길에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며칠 정도 해외로 여행 가면 좋겠다. 어때?"
겉으로는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었지만 당분간은 그저 소망에 불과한 자신의 현재를 투정하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겠지.
늦은 밤이 되어야 퇴근하는 그의 귀갓길이 항상 '여느 때보다 밝은 밤(いつもより明るい夜)'이었으면 좋겠다.